내가 선 자리에서 보이는 것이 진실의 전부일까?

하전 박황희의 노변정담(12) -동파(東坡)의 시로 본 가을 단상​ ‘설니홍조’ '제서림벽' 시가 건네는 가을과 인생, 인연의 지혜 흔적은 사라지므로 집착하지 말고 시선은 불완전하니 단정하지 말며 인연은 언젠가 끝날 수 있으므로 만나는 동안 진실하게 사랑하라

2026-08-31     박황희 고려대 한문학과 겸임교수
소동파의 '한식첩'. 두 수의 시를 직접 쓴 행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왕희지의 '난정서', 안진경의 '제질문고'와 함께 중국의 3대 행서로 꼽힌다.
그가 절망 속에서 쓴 이 글씨는 900여 년이 지난 지금, 중국 서예사에서 가장 비싼,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 되었다. 현재는 대만 고궁의 국보다.

[고양신문] 1. 설니홍조(雪泥鴻爪)
정처 없는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아는가?​
​인생은 눈 녹은 진흙에 새겨진 기러기 발자국 같은 것 ​
​진흙 위에 우연히 발자국 남겼지만​
​다시 날아간 기러기 어디로 갔는지 어찌 알겠는가?​

인생도처지하사 - 人生到處知何似 
​응사비홍답설니 - 應似飛鴻踏雪泥 
니상우연유지조 - ​泥上偶然留指爪 
​홍비나부계동서 - 鴻飛那復計東西 

위 시의 원제는 ‘화자유면지회구(和子由澠池懷舊)’이다. 동파의 동생 소철(蘇轍)의 자가 자유(子由)인데 그가 지은 시 ‘면지회구(澠池懷舊)’에 화답하는 시이다. 면지(澠池)는 지금의 하남(河南) 지역을 말하며 회구(懷舊)는 옛일을 회상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제목의 의미는 ‘동생 자유가 면지에서 있었던 옛일을 회상하며 지은 시에 대하여 화답하는 시’라는 뜻이다. 대중에게는 ‘설니홍조(雪泥鴻爪)’로 더 잘 알려져 여기서는 이를 따랐다. 이 시는 동파(東坡) 38살이던 1074년경에 동생 소철과 함께 면지에서 함께 과거 공부하며 술 마시고 토론했던 옛정을 회상하며 주고받은 시다. 당시 동파는 정치적 탄압과 벼슬의 부침으로 잦은 관직 이동(호남→하북→하남)을 겪으며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로 ‘떠돌이 인생과 흔적의 덧없음’을 절실히 느끼던 시기였다.
1연은 자신의 유배와 방랑의 삶을 돌아보며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묻는 구절이다. 2연은 인생은 분명 ‘행적(足跡)’을 남기지만, 그것은 매우 덧없고 사라지기 쉬운 흔적이라는 깨달음이다. 3연은 사람의 만남, 인연, 기억 같은 것들 또한 잠시 스쳐지나며 남기는 흔적 같은 것이기에 인생의 만남과 사건은 ‘필연’이라기보다 ‘우연’의 성격이 강하다는 자각이다. 4연은 결국 인생과 인연은 스쳤다가 흩어지므로 되돌아본들 이미 부질없는 것이라는 통찰이다. 
인생의 무상함과 아울러 진흙 위에 남겨진 흔적을 ‘우연(偶然)’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이는 삶에서의 만남이나 자취가 계획된 것이 아니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인간이 정치적 운명이나 인생의 변화뿐만 아니라 지나간 일에 대한 집착을 떨쳐 버려야 한다는 지혜를 나타낸다. 이는 단순한 회한(悔恨)이 아니라, 삶을 관조(觀照)하고 흐름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로서 동파 특유의 통찰이 담겨 있다. 

 

2. 제서림벽(題西林壁)
가로에서 보면 능선이 되고, 옆에서 보면 봉우리가 되니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에 따라 그 모습이 각각 다르다. 여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다만 내가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다.

횡간성령측성봉 - 橫看成嶺側成峰

원근고저각부동 - 遠近高低各不同

불식여산진면목 - 不識廬山眞面目

지연신재차산중 - 只緣身在此山中

위의 시는 동파 나이 48세 때이던 1084년에 황주(黃州) 유배 시기에 쓴 시이다. 같은 산이라도 보는 자리와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사물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는 까닭은 내가 그 속에 갇혀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이는 단순한 산수에 관한 시가 아니라 관점(視角)이 갖는 인식론적 상대성과 자기 한계에 대한 자각을 노래한 철학적 시이다. 
관점에 따라 진실이 변한다. ‘횡(橫)’은 긴 능선, ‘측(側)’은 뾰족한 봉우리를 의미한다. 하나의 사물에서 여러 모습이 보이는 것, 이는 단순한 사물의 묘사가 아니라 상대주의적 인식론이다. 전체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주관의 한계, 번뇌 속에서 본성을 보지 못한다는 사상과도 이어진다. 자기 위치를 벗어나야 전체가 보인다. 
중국 문학사에서 ‘관점의 시(視角之詩)’로 유명한 이 시는 단순히 산수와 풍경에 관한 시가 아니라 현대적 인식론을 제시한 고전으로 평가된다. 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보는 시,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순간을 포착한 시, 유배의 고난 속에서도 자기 한계를 직시하는 지혜와 철학의 시다.
‘설니홍조(雪泥鴻爪)’는 삶의 흔적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응시한 시이며, ‘제서림벽(題西林壁)’은 보이지 않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사고한 시다. 전자는 우연성과 허무, 후자는 상대성과 통찰이라는 주제를 갖는다. 38세 때의 시가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체험적 시라면 48세 때의 시는 철학적으로 정제된 사유의 시라 할 수 있겠다. 
두 시는 서로 다른 주제를 말하고 있으나 근본 구조에는 공통점이 있다. 두 시에서 나타나는 공통된 인식은 ‘자기 위치’에 대한 자각에 있다. 즉 ‘내가 어디에 서 있느냐가 내가 보는 세계를 결정한다’라는 것이다. ‘내가 떠나온 자리’는 기러기가 이미 사라진 자리이고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여산 전체를 볼 수 없는 자리이다. 둘 다 나의 위치가 내가 보는 세계를 결정한다는 인식의 출발점이다. 
‘설니홍조’에서는 인생의 흔적이나 인연의 우연성이 덧없음을 깨닫고 집착을 내려놓는 태도를 견지하였고 ‘제서림벽’에서는 관점의 상대성에 대한 이해와 사물의 진면목은 한 시점에서 본 것만으로 전체를 단정할 수 없다는 철학적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전자는 ‘흔적의 소멸’을 통해 무상(無常)을 말하고, 후자는 ‘관점의 변화’를 통해 진실의 다면성을 말한다. 

소동파 초상화

3. 흔적을 남기는 사람과 바라보는 사람
소동파의 두 시를 함께 읽으면 한 인간의 삶과 인식에 관한 깊은 통찰에 이르게 된다. ‘화자유면지회구’가 지나간 삶의 흔적과 무상함을 바라본 시라면, ‘제서림벽’은 현재 내가 서 있는 자리와 그로 인해 생기는 인식의 한계를 성찰한 시다. 하나는 ‘시간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관점의 문제’다. 하나는 지나간 삶이 사라지는 것을 말하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삶조차 온전히 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말한다. 그러나 결국 두 시가 던지는 질문은 하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인생은 스쳐 지나가고, 우리가 보는 세계는 언제나 부분적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바라본 하나의 모습일 뿐이다. 여산이 보는 방향에 따라 능선이 되기도 하고 봉우리가 되듯, 인간의 관계와 삶도 시선과 거리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내가 옳다는 것과 내가 전부 옳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때로는 관계 속에 너무 깊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관계의 진실을 보지 못한다. 한 걸음 물러나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섬을 떠나야 섬의 참모습이 보이는 것처럼.
‘설니홍조’의 기러기는 흔적을 남기고 떠난다. 삶도 그러하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며 누군가의 기억에 흔적을 남긴다. 그러나 그 흔적은 영원하지 않다. 그렇다고 그 만남의 의미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라지기 때문에 소중하고, 끝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삶과 인연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인연이 소중하다고 모든 관계를 끝까지 이어가려는 것은 오히려 인연과 흔적에 대한 집착일 수 있다. 인연은 필연이라기보다 우연에 가깝고, 우연으로 시작된 만남에는 어쩌면 저마다의 유통기한이 있다. 어떤 인연은 평생 이어지지만, 어떤 인연은 잠시 머물다 제 역할을 다하고 떠난다. 중요한 것은, 그 흔적이 영원한가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잠시 존재했음에도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었다는 사실이 삶의 가치인지도 모른다. 
‘제서림벽’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본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상대가 틀렸다고 생각하고, 내가 경험한 것이 사실이면 다른 사람의 경험은 잘못되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여산’은 보는 방향에 따라 능선이 되기도 하고 봉우리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내가 옳다는 것과 내가 전부 옳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갈등이 계속되고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 양보가 사라졌다면 억지로 관계를 붙잡기보다 그 관계의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때로는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상대를 함께 존중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동파는 우리에게 삶이 덧없다고 말하면서도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덧없음을 알기에 오늘을 살아가고, 인간의 인식이 불완전함을 알기에 타인을 쉽게 단정하지 않는다. 아마 이것이 동파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깊은 지혜일 것이다. 흔적은 사라질 것이므로 집착하지 말고, 시선은 불완전하므로 단정하지 말며, 인연은 언젠가 끝날 수 있으므로 만나는 동안 진실하게 사랑하라.
이런 점에서 ‘무상(無常)’은 반드시 허무를 뜻하지 않는다. 사라지기 때문에 소중하고, 끝이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 가을이 아름다운 것도 단풍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인생은 흔적을 영원히 남기는 일이 아니라, 그 흔적이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오늘의 길을 온전히 걸어가는 일인지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동파가 천 년의 시간을 건너 오늘의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아름다운 가을의 지혜일 것이다. 
그렇다면 시란 무엇인가. 사라지는 인생 위에 잠시 남겨지는 가장 아름다운 설니홍조(雪泥鴻爪)​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