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돌아가지 못하고 임진강 언덕에 묻힌 신라 마지막 임금
유경종 기자의 역사문화탐방 ⑩ 연천 장남면 경순왕릉
“백성들 뒤따르며 경주로 향하던 운구 행렬
민란 두려워한 고려 왕실, 다급히 멈춰 세워”
역사적 사실 떠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애도
잊혀졌다 발견되고 반복…왕릉의 운명도 기구
[고양신문] 거리를 걷다 보면, 간판이 멀쩡히 달린 매장 유리문에 ‘임대’ 글씨가 나붙은 모습이 종종 눈에 띈다. 그때마다 ‘저기서 장사를 하던 사장님은 얼마나 속상할까’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작은 가게가 문을 닫아도 마음이 심란한데, 하물며 수백 년 이어온 왕조를 자기 대에서 망해 먹은 왕이라면? 오늘은 그 비운의 주인공이 잠든 왕릉을 찾아 떠나보자. 천년왕국 신라의 마지막 장을 덮은 인물이자 500여 년 이어진 고려 역사의 첫 장에 등장하는 인물, 신라 56대 국왕 경순왕(敬順王, 897~978)이다.
국운 기운 신라, 항전 대신 투항 선택
경순왕의 생애는 파란만장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본명이 김부(金傅)였던 그는 태종 무열왕의 후손이었지만, 후삼국 혼란기 신라에는 박씨 왕족이 3대째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928년 신라를 침략한 후백제 견훤이 경애왕을 자결시키고, 김씨 왕가의 방계인 김부를 왕위에 올린다. 왕조의 말기에 외세에 의해 꼭두각시 임금이 내세워지는 상황은 훗날 고려 공양왕, 조선 순종에게서 고스란히 반복되는 장면이다.
임금이 된 이후 경순왕은 후백제와 고려의 틈바구니에서 나름 국가 재건과 왕실 존속을 모색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신라의 국운을 되살릴 순 없었다. 결국 대세가 고려로 급격히 기울자 재위 8년째 되는 935년, 신라의 희망 없는 생명연장을 포기하고 고려에 백기를 들고 만다. 한반도 최초의 통일왕국을 일으켰던 천년사직이 너무도 얌전하게, 또는 허무하게 자진해서 셔터를 내린 것이다.
고려 귀족으로 예우받으며 천수 누려
나라를 통째로 공물로 바친 임금에 대한 고려 태조 왕건의 예우는 확실했다. 피를 흘리지 않고, 한반도 통일왕조의 정통성마저 접수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신라 왕도 금성(경주)을 출발한 경순왕 행렬이 열흘에 걸친 여정 끝에 고려 개경에 도착하자, 왕건이 예복을 갖추고 마중나가 일행을 정중히 맞이했다. 이 과정에서 훗날 마의태자(麻衣太子)로 불리게 된 신라 태자 일(鎰)이 고려에 투항하는 것을 거부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얘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이후 경순왕은 정승공(政丞公)에 봉해지고, 왕건의 딸과 혼인도 한다. 형식상으로는 임금 다음으로 높은 지위를 누렸다지만, 어디까지나 신라 백성들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한 또 다른 꼭두각시의 삶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81세까지 천수를 누렸으니 30여 년을 신라 진골귀족으로, 8년을 신라 왕으로, 40여 년을 고려의 신하로 살았던 셈이다. 사후에 얻은 ‘경순왕’이라는 시호를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이유다.
18세기 조선, 사대부 양식으로 능역 정비
경순왕이 묻힌 곳은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다. 일산동구청을 출발해 자유로~율곡로를 달려가다 장남교로 임진강을 건너 서북쪽으로 올라가면 고랑포구역사공원이 나오고, 이정표를 따라 조금 더 가면 경순왕릉 주차장에 도착한다. 일산에서 50분 남짓 걸린다.
굽은 언덕길을 따라가면 단정하게 정비된 연두색 잔디마당과 구릉 위에 자리한 단아한 왕릉이 나타난다. 신라왕릉이라고 해서, 경주에서 마주했던 웅장한 풍경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둥근 봉분 앞을 지키는 장명등과 석수, 망주석, 주변을 둘러싼 곡장 등이 한눈에 봐도 조선 후기 방식이다. 이유가 있다. 왕릉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고려 초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며 잊혀진 채 방치됐다가 조선 영조 임금 시절인 1747년에 후손들이 왕릉 주변에서 비석을 발견하며 비로소 긴 잠에서 다시 깨어났기 때문이다. 조선은 나름 예를 갖춰 왕릉을 조선 후기 사대부의 묘를 조성하는 양식으로 정비했다. 물론 고려의 양식이 남아있는 부분도 있다. 학자들은 능 앞부분이 2단의 석단으로 정리된 부분을 고려 왕릉의 흔적이라고 설명한다.
전쟁과 분단으로 또다시 잊혀졌다가 재발견
경순왕릉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왕릉이 자리한 장남면 임진강 유역 일대는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고, 휴전 이후 군사분계선이 그어지며 민통선 안쪽에 포함되고 말았다. 경순왕릉의 존재가 또다시 잊혀진 것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 작전지역 순찰을 돌던 한 군장병에 의해 총탄 자국이 패인 채 수풀에 덮여있던, ‘신라경순왕지능(新羅敬順王之陵)’이라고 적힌 능표가 발견됐다. 학술조사를 거쳐 1975년 사적으로 지정되고 재실과 비각 등이 조성됐다. 이후 민통선이 경순왕릉 뒤쪽으로 물러서게 되며 비로소 지금처럼 방문객의 접근이 가능해졌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경순왕릉은 신라의 임금이 고려의 예법에 따라 묻히고, 18세기 조선시대에 재발견되고, 1970년대 대한민국에서 재재발견된 유적인 셈이다. 무덤의 주인공을 닮아서일까, 왕릉의 히스토리도 못잖게 파란만장하다.
다양한 전승에 담긴 망국 임금에 대한 애도
신라 왕릉 중 경주가 아닌 곳에 자리한 경우는 경순왕릉이 유일하다. 앞서 말했듯 경순왕은 사실상 더 많은 세월을 개경에서 고려 귀족으로 살다가 생을 마쳤으니, 개경 가까이에 능을 쓴 게 크게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천년왕조를 끝맺은 망국의 임금 능은 다양한 이야기를 후대에 남겼다. 경순왕릉에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는 연천군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옮겨보자.
“김부대왕(경순왕)께서 승하하자 운구 행렬이 경주로 향했고, 수많은 백성들이 통곡을 하며 길게 뒤를 따랐습니다. 고려 궁궐에서 이 광경을 보자 민심이 동요하면 어쩌나, 심장이 덜컥 했습니다. 다급히 사람을 보냈고, 마침 고랑포구 앞에서 배를 기다리며 쉬고 있던 운구 행렬을 ‘왕릉은 개경 100리 밖에 쓸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멈춰 세웠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배산임수 명당에 능을 조성한 것입니다.”
글로 쓰며 많이 생략했지만, 해설사의 설명에는 다양한 전승들을 취합한 드라마틱한 스토리텔링이 담겼다. 물론 역사학자들은 이런 전승의 많은 부분이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추정한다. 예를 들어 ‘왕릉은 왕도 100리 안에 써야 한다’는 개념은 조선시대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관계를 떠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들은 다양한 의미를 우리에게 귀띔해준다. 망국의 임금에 대한 백성들의 연민, 신라 유민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했을 고려 초의 상황, 강물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한 등이 경순왕릉의 전승 속에 담긴 것이다.
민간신앙에서 영신으로 모셔진 ‘김부대왕’
해설사가 언급한 ‘김부대왕(金傅大王)’이라는 호칭도 흥미롭다. 사후 고려에서 붙인 시호 대신 신라 왕족 시절의 이름 뒤에 ‘대왕’을 붙였다. 자료를 찾아봤더니 경순왕은 민간신앙에서 영신(靈神)으로 모셔진 왕 중 한 명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여러 지방의 설화나 전승에서 경순왕, 또는 김부대왕이 마을을 지키는 당신, 서낭신, 조상신의 형태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민간에서 신으로 모셔지는 역사 인물에게는 대개 두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첫째는 의로운 사람일 것, 둘째는 비통하게 최후를 맞았을 것. 영험한 무속신으로 손꼽히는 최영 장군, 남이 장군, 임경업 장군 등이 모두 이러한 조건에 부합한다. 요즘 말로 하면 ‘약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이 있을 만한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경순왕을 김부대왕이라고 숭앙하는 매커니즘도 실마리가 풀린다. 고려와 최후의 결사항전을 피하고, 피를 흘리지 않고 국권을 넘긴 경순왕의 선택이 백성들 입장에서 보자면 더없이 의로운 행위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여기에 ‘평생 망국의 한을 품고 살다가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임진강변에 묻힌 비운의 임금’이라는 애도의 서사가 더해지고, 마의태자의 애절한 이야기까지 보태져 민초들에게 기림의 대상으로 추앙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경순왕은 살아생전과는 또 다른 의미와 존재감으로 천년의 시간을 건너고 있다.
고대 유적 곳곳에 남아있는 임진강변 마을
경순왕릉을 방문하는 길에 고랑포 마을의 흔적도 둘러보면 좋다. 서해바다와 이어진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온 배들이 짐을 내리던 고랑포는 일제강점기 경기북부에서 가장 큰 포구이자 물류 거점으로 손꼽혔다고 한다. 번성했던 시절에는 북적이는 마을이 형성됐고, 각종 관공서와 종로 화신백화점 분점이 운영됐을 정도로 사람과 물자가 넘쳐났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임진강 전선에서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며 마을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후 민통선이 그어지며 진공의 공간으로 수십 년을 보내다가, 민통선이 위쪽으로 물러나고서야 사람들의 발길을 맞이하고 있다. 유료 전시관인 연천고랑포구역사공원을 방문하면 마을의 히스토리를 다룬 다양한 전시물과 체험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다.
그밖에도 고구려 방어시설인 호로고루, 학곡리 고인돌과 초기 백제시대 적석총 등 임진강변을 따라 남겨진 다양한 옛 흔적들고 가까운 거리에 있다. 조만간 별도의 나들이 기사를 통해 소개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