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닿지 못한 손끝…사랑은 조각으로 남았다
유럽 여행에서 만난 미술 이야기 ③까미유 클로델의 시간을 걷다
[고양신문]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이 눈길을 붙잡았다. 긴 작업복을 입은 젊은 여인이 자신보다 훨씬 큰 조각 앞에 서 있다. 머리는 단정히 올렸고 시선은 손끝이 닿은 곳에 머물러 있다. 스물두 살의 까미유 클로델이다. 곁에는 함께 작업하던 제시 립스콤(Jessie Lipscomb)이 있고, 그녀의 손길이 향한 작품은 ‘사쿤탈라’였다. 사진 속 까미유에게서는 훗날 그녀의 이름을 따라다니게 될 ‘로댕의 연인’이라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사랑에 흔들리는 여자도, 비극의 주인공도 아니다. 흙을 만지고 인체의 움직임을 살피며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려는 젊은 조각가가 있을 뿐이다. 한 사람의 몸이 다른 사람에게 기울어질 때 생기는 미세한 긴장과 온기, 손끝과 손끝 사이에 흐르는 감정을 그녀는 이미 조각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렵, 그녀의 삶 깊숙이 한 남자가 들어와 있었다. 오귀스트 로댕이었다. 스승과 제자로 만난 두 사람은 조각에 대한 열정으로 빠르게 가까워졌다. 로댕은 젊은 까미유에게서 남다른 재능을 발견했고, 까미유 역시 거침없이 인체를 파고드는 로댕의 조각에 매혹되었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은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를 넘어 작품을 나누는 동료이자 연인이 되었다. 스물네 살의 나이 차이도 그들을 막지는 못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로댕에게는 이미 조강지처나 다름없는 로즈 뵈레(Rose Beuret)라는 여인이 있었다. 까미유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그의 가난과 무명의 시간을 함께 견뎌온 여자였다. 로댕은 젊고 재능 넘치는 까미유에게 강렬하게 끌렸지만 로즈와 함께해온 오랜 삶 또한 버리지 못했다. 한쪽에는 새롭게 타오르는 열정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세월이 쌓아 올린 삶이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그 사랑이 들어설 자리는 처음부터 온전히 비어 있지 않았다. 미술관에서 로댕의 ‘영원한 우상’을 마주했다. 남자는 무릎을 꿇고 여인의 몸에 얼굴을 묻듯 다가가 있다. 여인은 그를 내려다본다. 두 육체는 서로의 체온이 느껴질 만큼 가깝다. 남자의 몸에는 갈망이 넘치고, 두 사람 사이에는 욕망과 황홀,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이 흐른다. 그것이 누구의 사랑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작품 앞에 서자 한때 서로에게 깊숙이 기울었던 로댕과 까미유의 시간이 자연스럽게 겹쳐 보였다. 하지만 사랑의 자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몇 해가 흐른 뒤, 무릎을 꿇은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되어 있었다.
‘성숙의 시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한 남자가 나이 든 여인에게 이끌리듯 앞으로 나아간다. 그의 몸은 이미 뒤쪽의 젊은 여인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그 뒤에서 젊은 여인은 무릎을 꿇은 채 두 팔을 뻗는다. 떠나는 사람과 붙잡는 사람.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세 사람의 몸만으로도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다만 내 시선이 오래 머문 곳은 그들의 얼굴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손이었다. 조금만 더 내밀면 닿을 것 같다. 그러나 끝내 닿지 않는다.
두 손 사이에 놓인 것은 몇 센티미터의 빈 공간이 아니었다. 이미 되돌릴 수 없게 되어버린 시간처럼 보였다. 어쩌면 사랑에서 가장 먼 거리는 수백 킬로미터의 이별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있으면서도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이 정도의 거리인지도 모른다. ‘성숙의 시대’는 흔히 로댕과 로즈, 그리고 까미유의 관계와 겹쳐 읽힌다. 떠나는 남자에게서 로댕을, 그를 데려가는 늙은 여인에게서 로즈를, 무릎을 꿇고 손을 내미는 젊은 여인에게서 까미유를 떠올리는 것이다. 그녀의 삶을 알고 작품을 바라보면 그런 해석을 떨쳐내기 어렵다. 그러나 한 남자를 둘러싼 세 사람의 사랑 이야기만으로 보기에는 이 작품이 품고 있는 세계가 너무 크다. 작품의 제목도 ‘이별’이나 ‘버림받음’이 아니라 ‘성숙의 시대’이다. 젊음에서 늙음으로, 만남에서 헤어짐으로, 머무름에서 떠남으로 흘러가는 시간.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삶의 한 시절을 까미유는 세 사람의 몸으로 만들어냈다.
생각해보면 우리 역시 수많은 것과 작별하며 살아간다. 사랑했던 사람을 보내고, 부모를 보내고, 젊음을 보내고, 한때 간절했던 꿈을 보내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느 계절과도 헤어진다. 그래서 ‘성숙의 시대’ 앞에서 바라보는 것은 어느 순간 까미유의 시간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시간이 된다. 까미유는 자신의 상처를 고백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개인의 경험을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떠남과 남겨짐의 감정으로 밀어 올렸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녀는 ‘로댕의 연인’이라는 이름에서 벗어나 자신의 언어를 가진 조각가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다음 전시실로 들어가 ‘간청’ 앞에 이르렀다. 남자는 사라졌다. 그를 데려가던 여인도 사라졌다. 한 사람만 남았다. 무릎을 꿇고 몸을 앞으로 내민 채 두 팔을 허공으로 뻗은 여자. ‘성숙의 시대’에서는 그래도 손을 내밀 대상이 눈앞에 있었다. 이제는 붙잡을 사람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서 그의 부재는 오히려 더 크게 다가온다.
떠난 사람은 사라졌지만, 붙잡으려던 몸짓은 남았다.
그 몸짓을 오래 바라보고 있자, 비로소 까미유의 조각이 닿으려 했던 곳이 보이는 듯했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그대로 쏟아내지 않았다. 기울어진 몸과 뻗은 팔, 닿지 못하는 손끝과 그 너머의 빈자리로 바꾸어 놓았다.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마음을 몸의 언어로 새겨놓은 것이다. 한 여인의 지극히 사적인 시간이 그렇게 조각이 되어 백 년을 건너왔고, 이제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에까지 가만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예술은 잃어버린 것을 되돌려놓지는 못한다. 다만 사라져가는 것의 흔적을 시간 너머까지 데려갈 수는 있다. 한동안 ‘간청’ 앞을 떠나지 못했다. 한 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그녀의 두 팔은 여전히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사람은 떠났고 사랑도 지나갔다. 하지만 끝내 닿지 못했던 손끝과 붙잡으려 했던 몸짓은 조각이 되어 오늘의 우리 앞에 이르렀다. 그것은 이제 까미유 한 사람의 사랑도, 한 사람의 상처도 아니었다. 살아가며 무언가를 간절히 붙잡아보았고, 또 놓아보내야 했던 우리 모두의 마음에 가까웠다.
어쩌면 그것이, 사랑이 조각된 까닭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