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째 이어온 『임원경제지』 완역…<본리지> 17년만에 증보개정판

2026-09-16     유경종 기자

연구 성과 반영해 번역·고증 대폭 보완  
그림·사진 등 800여 점 시각자료 삽입
임원경제연구소, 24년째 ‘전권 완역’ 매진
해외 석학 “여러 국제 언어로 번역돼야”

[고양신문] 조선 최대 실용백과사전 『임원경제지』의 한글 완역 작업을 24년째 이어오고 있는 임원경제연구소(소장 정명현)가 2009년 처음 번역했던 <본리지>를 대폭 보완해 17년 만에 증보개정판으로 출간했다. 

새롭게 출간된 『임원경제지 본리지』(林園經濟志 本利志)는 기존 3권에서 4권으로 분량이 늘었다. “초판 출간 후 축적된 연구 성과를 반영해 미진했던 번역·고증을 대폭 보완했고, 그림·사진·일러스트 등 총 827점의 시각자료를 수록해 오늘날의 독자들이 원전의 내용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게 연구소 측의 설명이다. 

책을 펼치면 수십 종의 곡식 종자와 재배 모습이 실제 사진으로 실려있고, 박물관에 남아있는 전통 농기구 유물도 폭넓게 소개됐다. 또한 원전의 설명과 평면 그림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수차와 농업기계 등도 새롭게 제작한 입체 도해와 구조도가 더해지니, 도구의 작동 원리가 직관적으로 파악된다. 한문으로 저술된 옛 농서를 현대어로 읽을 수 있게 번역한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조선의 농업지식을 오늘날의 독자와 연구자 앞에 생생하게 되살려놓은 것이다. 

“농사, 백성 살리고 국가 지탱하는 근본”

『임원경제지』는 조선 후기 학자 풍석 서유구(楓石 徐有榘, 1764~1845)가 19세기 전반에 파주 농촌마을에 기거하며 편찬한 16개 분야, 총 113권의 방대한 생활지식 백과사전이다. 저자는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음식, 의복, 주거, 의학, 원예, 축산어업, 상업, 예술과 취미까지 향촌 생활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긴 분야는 당연히 농업이었다. 이번에 증보개정판을 낸 <본리지>(本利志)가 바로 농업을 다룬 책이다.

제목을 살펴보면 ‘본리(本利)’에서 본(本)은 봄에 씨를 뿌리고 농사를 시작하는 밑천을, 리(利)는 가을에 거두는 수확을 뜻한다. 하나의 씨앗이 수백 배 결실로 돌아오는 농업이야말로 백성을 먹여 살리고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활동이라는 개념이 제목 속에 담긴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저자는 △토지제도와 수리 △토양과 농지 △농지 조성과 경작 △종자 선택과 파종 △각종 곡물의 품종과 재배방법 △농업재해와 대응방법 △농가월령 △농기구와 관개시설이 이르기까지 곡식농사의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 

무엇보다도 농사의 기술을 열거하는 수준을 넘어, 농사를 가능하게 하는 자연환경과 기술, 제도와 인간을 하나의 체계로 파악했다는 점이 <본리지>의 도드라진 특징이다. 다시 말해, 저자 서유구는 농업을 토지와 물, 기후와 작물, 인간의 노동과 제도가 서로 연결되고 상호 작용하는 유기적인 시스템으로 바라본 것이다. 

‘임원경제지’ 서울대 규장각본. 임원경제연구소 제공

“민속과학의 위대한 편찬물 중 하나” 극찬

책의 앞부분에는 두 편의 흥미로운 글이 실렸다. 맨 앞 ‘펴낸이의 글’을 쓴 이는 완역본 시리즈 출간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풍석문화재단의 신정수 이사장이다. 신 이사장은 “서유구 선생이 <본리지>에서 보여준 태도는 매우 현대적”이라며 “<본리지>가 담고 있는 자연을 살피는 태도, 땅을 아끼는 마음, 먹거리를 삶의 근본으로 바라보는 관점, 기술을 개선하여 백성의 삶을 이롭게 하려는 정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소중하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추천사’는 미국 스미소니언협회 아시아무화사 프로그램 소장인 폴 마이클 테일러 박사가 썼다. 세계적인 인류학자인 테일러 박사는 ‘세계적 가치를 지닌 한국의 고전 민속과학과 무형문화유산의 재조명’이라는 긴 제목의 글을 통해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오늘날 ‘민속과학(erhnoscience)’이라 불리는 분야에 관한 세계에서 가장 이르고도 가장 위대한 편찬물 가운데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며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또한 서유구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생활과 지식체계를 백과사전적 규모로 기록했다는 점을 짚으며 “그(서유구)는 세계적인 민족지학의 선구자(proto-erhnographer)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고 밝혔다. 

아울러 임원경제연구소의 방대한 연구와 주석작업을 거쳐 출간한 한국어 번역본이 영어를 비롯한 여러 국제 언어로도 변역되기를 기대한다는 바람을 밝혔다. 한국의 고전을 넘어, 세계 지식사와 인류학적 관점에서 『임원경제지』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했다는 점에서 뜻깊은 평가가 아닐 수 없다. 

정명현 임원경제연구소 소장. 

박제된 기록, 살아 숨쉬는 텍스트로 부활

책의 번역작업을 총괄한 임원경제연구소 정명현 소장은 32페이지 분량의 ‘서문’을 통해 24년째 이어지고 있는 『임원경제지』 번역 작업의 가치와 의의, 완역을 눈앞에 둔 심경과 바람을  피력했다. 정 소장은 아무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던 『임원경제지』가 번역되고, 저자 서유구가 부각됨으로써 “조선 문명을 보다 균형잡힌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자평했다. “당대의 맥락과 학술적 고증을 온전히 담아내는 정밀한 고전번역이야말로 지식의 홍수 속에서 우리 문명의 사상적 닻으로서 그 가치가 더욱 막중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 소장은 임원경제연구소와 풍석문화재단의 연구와 활동이 “『임원경제지』라는 저술과 저자 서유구에 매료된 이들의 자발적 조직”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19세기 조선에서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실용 지식을 집대성했던 ‘이질적 지식인’ 서유구가 그랬던 것처럼, 연구소와 재단의 우직한 뚝심이 “과거의 박제된 기록을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살아 숨쉬는 일용의 텍스트’로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다. 

서유구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실학자들과의 비교도 흥미롭다. 정명현 소장은 “연암 박지원이 날카로운 비교 관찰자였고, 초정 박제가가 소비와 통상을 외친 경제혁명가였으며, 다산 정약용이 국가 운영의 시스템 설계자였다면, 풍석 서유구는 당장 내 집에서 실천할 수 있는 현실의 세계를 구축한 ‘실무가’이자 ‘기술의 민주화’를 꿈꾼 인물”이라고 정의했다. 풍석이 남긴 자료에 대한 연구소의 집요한 분석과 재현 또한 “『임원경제지』라는 위대한 원천 소스가 오늘날 기후 위기와 지속 가능성을 고민하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K-테크놀로지의 소스 코드’임을 대중과 학계에 증언하고픈 소박한 소망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풍석문화재단과 임원경제연구소가 출간한 『임원경제지』 완역본 시리즈 일부.

『임원경제지』 완역 눈앞...<인제지>만 남아 

총 16지(志)로 구성된 『임원경제지』 번역 작업은 이제 『동의보감』 이후 의학 지식을 집대성한 <인제지>(仁濟志) 한 분야만 남았다. 시기적으로 가까우면서도, 오히려 아무도 읽을 수도, 뜻을 이해할수도 없었던 조선 후기 생활지식의 보고와 현대인을 잇는 통행로를 놓는 작업이 전구간 완전 개통을 목전에 두고 있는 셈이다. 

정명현 소장은 『임원경제지 본리지』 개정증보판 서문 말미에 “묵묵히 이 길을 함께 걸어와 준 역자들과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준 후원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면서 “집집마다 상농(上農)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풍석 선생의 원대한 비전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안목과 미래 세대의 삶터 위에서 새로운 혁신의 동력으로 찬란하게 부활하기를 기대한다”는 바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