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AI 거버넌스 허브가 왜 고양에 와야 하는가
[높빛시론] 김범수 자치도시연구소 소장
[고양신문] “AI를 누가, 어떤 원칙과 규칙으로 통제할 것인가?” 인간이 만든 기술이 인간의 삶을 바꾸고 있다면, 그 기술이 인간의 존엄과 자유, 안전과 민주주의를 해치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다.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AI를 민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법과 제도, 그리고 글로벌 수준의 약속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 추진되고 있는 글로벌 AI 거버넌스 허브는 세계 각국의 정부와 국제기구, 대학과 연구기관, 기업과 시민사회가 함께 모여 인공지능을 통제하는 국제적 규범과 제도를 논의하고 만들어가는 공론장의 의미를 갖는다. 고양시가 그 장소가 돼야 할 역사적·정치적 이유가 있다.
유럽은 AI를 법과 제도로 통제하기 시작했다. 2018년 AI 윤리에 대한 토론을 시작해 2024년 유럽의회는 유럽 AI 법을 제정했다. 유럽은 인공지능을 단순히 산업 경쟁력의 문제로만 바라보지 않고 인간의 기본권, 안전, 책임, 투명성, 법치의 문제와 연결해 통제하려는 접근을 발전시켜 왔다. 이것은 유럽이 오랫동안 발전시켜 온 인권과 법치주의, 시민적 가치와 민주적 제도의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는 시민의 참여와 시민사회의 역할이 컸다. 대한민국은 권위주의적 통치의 경험을 거쳐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왔다. 그 과정에서 시민들은 단순히 정부의 정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었다. 시민들은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역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했고 정치권력의 민주적 통제를 위해 행동했다.
과거에는 정부와 권력이 시민의 삶을 결정했다면, 이제는 AI가 그 자리를 탐내고 있다. AI라는 새로운 권력을 누가 통제할 것인가? 정부만이 결정해서도 안 되고, 기술기업만이 결정해서도 안 된다. 전문가의 지식도 필요하지만 시민의 목소리도 필요하다. AI 거버넌스는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왜 고양인가? 고양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시민이다. 고양에는 시민들이 지역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행동해 온 경험이 있다. 과거 일산신도시의 개발 과정에서 시민들은 주거환경과 도시의 발전 방향을 둘러싸고 다양한 목소리를 냈다. 이 과정에서 주거지 인근 유흥시설 문제와 골프장 개발 문제 등 지역의 환경과 생활권을 둘러싼 사안에 시민사회가 조직되고 행동하면서 지방정부와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경험은 “내가 사는 도시의 문제는 시민이 함께 결정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경험이다.
AI 거버넌스의 핵심은 시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AI를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인가에 있다. 글로벌 AI 거버넌스 허브가 고양에 유치된다면 우리는 국제기구 하나를 유치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고양시 전체를 AI 거버넌스의 리빙랩(Living Lab)으로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AI가 복지 대상자를 판단한다면 시민은 그 기준을 알 수 있어야 한다. AI가 교통정책을 결정하는 데 활용된다면 어떤 기준으로 우선순위를 정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AI가 행정서비스에 사용된다면 시민은 AI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AI가 교육과 의료, 환경과 안전에 활용된다면 시민과 전문가, 정부와 기업이 함께 그 원칙을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시민적 AI 거버넌스(Civic AI Governance)다. 고양은 국제적인 AI 규범을 연구하는 동시에 그 규범을 시민의 일상에서 실제로 실험하는 도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고양에는 또 하나의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 뿌리는 일산신도시가 만들어지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산신도시 개발 과정에서 외교단지 유치가 중요한 도시 자족기능의 하나로 논의되었고, 당시 고양시의회는 외교단지를 유치하기 위해 중앙정부와 관계기관에 지속적으로 건의했다. 그러나 여러 검토 끝에 외교단지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고, 해당 부지는 법조 교육단지를 유치하는 방향으로 전환됐다. 당시 고양시의회 회의록에는 이러한 논의와 중앙정부에 대한 약속 이행 촉구 과정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역사를 단순히 “실현되지 못한 과거의 계획”으로만 보고 싶지 않다.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왔다. 1990년대 일산이 꿈꾸었던 국제도시의 비전이 있었다면, 2030년대 고양은 그 비전을 AI 시대에 맞게 다시 만들어낼 수 있다. 과거에는 외교관과 국가가 만나 국제 문제를 논의하는 도시를 꿈꾸었다면, 이제는 정부와 국제기구, 기업과 대학, 시민사회가 만나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국제규범을 만들어가는 도시를 꿈꿀 수 있다. 스위스의 제네바가 20세기 국제외교의 중요한 도시였다면, 대한민국 고양은 21세기 AI 거버넌스의 국제도시를 지향해 보자.
고양시는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글로벌 AI 허브 유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9월 7일에는 시민 주도의 범시민 추진위원회도 출범했다. 10만 시민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 과제가 행정만의 과제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관심사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글로벌 AI 거버넌스 허브 유치는 고양시민 모두, 미래 세대를 위한 프로젝트이다. 시민사회는 시민의 관점에서 AI 거버넌스의 원칙을 제안하고, 대학과 연구기관은 지식과 연구를 제공하며, 기업은 기술과 혁신을 제공하고, 지방정부는 실험과 행정을 담당할 수 있다. 그리고 국제기구와 세계의 전문가들이 고양에 모여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규범을 논의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고양은 세계가 AI에 민주적 규범을 덧입히기 위해, 인류의 미래를 논하기 위해 찾아오는 시민적 AI 도시(Civic AI City)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