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들판에서 들려오는 세레나데

이명혜 기자의 에코로그(4) 날개로 노래하는 귀뚜라미

2026-09-21     이명혜 기자

 

왕귀뚜라미.

[고양신문] “호롱호로로로롱…”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의 뙤약볕이 물러서고,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창으로 스며들기 시작하면 밤공기를 채우는 정겨운 노랫소리가 있다. 누군가는 ‘귀뚤귀뚤’이라 쓰지만, 내 귀에는 어쩐지 ‘호롱호로로롱’ 하는 아련하고 구슬픈 소리로 들리곤 한다. 초가을 밤이면 마당에 몰래 들어온 왕귀뚜라미 한 마리가 볼륨을 높여 목청을 돋우는 통에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아른거린다.

선선한 바람과 함께 찾아오는 친숙한 곤충은 바로 귀뚜라미다. 귀뚜라미도 왕귀뚜라미, 극동귀뚜라미, 알락귀뚜라미 등 종류도 다양하고, 저마다의 모습과 소리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책에서는 '귀뚤귀뚤'하고 운다던 극동귀뚜라미의 소리도 내 귀에는 ‘극극극극’하고 들리니, 가만히 듣다 보면 혼자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귀뚜라미나 베짱이 같은 풀벌레의 소리를 ‘운다’거나 ‘노래한다’고 표현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는 정교한 악기 연주에 가깝다. 곤충마다 소리 내는 방식이 다른데, 귀뚜라미는 두 날개를 겹친 뒤 빠르게 비벼 마찰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소리를 낸다. 오른쪽 날개 안쪽에는 오돌도돌한 빨래판 모양의 마찰기가 있고, 왼쪽 날개에는 딱딱한 긁개 구조가 있어 둘을 비비면 소리가 난다. 빗을 손톱으로 훑으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이때 발생하는 진동이 날개 표면의 울림판에서 증폭되어 큰 소리로 들리게 된다. 방울벌레처럼 날개를 수직에 가깝게 번쩍 들고 소리를 내는 녀석들도 있지만, 왕귀뚜라미를 유심히 관찰해보니 약 30도 정도 들어 올려 연주한다. 수컷의 이 소리는 제 영역을 지키려는 경고이자, 천적을 교란하고 암컷을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다.

선선한 바람과 함께 가을 풀밭에 곤충들이 찾아오고 있다.

이 조그만 생명체의 몸에는 경이로운 생명의 신비가 숨어 있다. 왕귀뚜라미는 더듬이에서 겹눈 위로 이어지는 흰색 띠무늬가 있어 흰 눈썹처럼도 보이고, 멋진 고글을 쓴 것처럼도 보인다. 놀랍게도 귀뚜라미의 귀(고막)는 머리가 아닌 앞다리 무릎 관절 밑에 붙어 있다. 머리를 자유롭게 돌리지 못하는 대신,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는 다리로 공기의 파동과 땅의 미세한 진동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을밤 산책길에 소리를 따라 다가가다 보면 뚝 하고 울음이 끊기는 이유도, 녀석들이 다리로 우리가 걸어오는 발자국 진동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변온동물인 귀뚜라미는 기온이 올라가면 날갯짓이 빨라지니 살아있는 ‘자연의 온도계’인 셈이다.

그러나 오늘날 풀벌레들은 살 곳을 잃어가고 있다. 사람 중심의 정갈함과 깨끗함을 위해 가해지는 제초제 살포와 예초 작업은 녀석들의 안식처를 단숨에 짓밟는다. 예초기가 지나간 공원 산책로에서 몸이 반토막 난 메뚜기나 날개를 잃은 베짱이를 만나는 일이 다반사다. 추석을 앞두고 곳곳에서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한 요즘, 풀을 벨 때 8㎝만 남겨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고작 키 8㎝의 풀밭만 있어도 풀벌레들이 생명을 이어가고 생물다양성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인심 좀 써서 10㎝쯤 남겨주면 더 고맙겠다.

알락귀뚜라미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에는 행운의 상징으로, 동화 <피노키오>에서는 주인공의 지혜로운 멘토이자 양심으로 등장하는 귀뚜라미. 시인 윤동주는 ‘귀뚜라미와 나와’라는 시에서 ‘아무에게도 알으켜 주지 말고/우리 둘만 알자고 약속했다’라며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로 표현했다. 이처럼 귀뚜라미는 아주 오랜 세월 우리 곁을 지켜온 친근한 동반자이자, 땅 밑의 죽은 낙엽과 유기물을 치워주는 자연의 소중한 '청소부'다.
귀뚜라미는 입이 아닌 날개로 노래하고, 귀가 아닌 온몸으로 세상의 소리를 듣는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매끈한 보도블록과 깔끔하게 깎인 잔디에 집착할 때, 귀뚜라미는 바닥에 낮게 엎드려 타자의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신념으로 모두가 소리 높여 주장하기 바쁜 오늘날, 귀뚜라미에게서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 오래된 지혜를 배워보자. 
마을 공터나 하천변의 작은 풀숲 한 뼘이라도 베지 않고 남겨두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풀벌레를 위한 배려이자, 화면 속에 갇혀 자라는 우리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생태감수성을 선물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