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범구 칼럼] 당신들 살 길만 찾지 말고

2026-09-22     정범구 전 주독일 대사
정범구 전 주독일 대사

[고양신문] “정치한다는 사람들! 당신들 살 길만 찾지 말고 우리같이 호미자루 잡고 사는 사람들 살 길을 좀 찾아줘!”

정치 현장을 떠난 지 오래 됐지만 과거 현장에서 만났던 한 어르신의 목소리는 아직도 내 귀에 쟁쟁하다. 16년 전인 2010년 2월 설 무렵, 음성 장날에서 만났던 어떤 나이 드신 농민이 내 손을 잡고 한 말씀이다. 당시 나는 충북 증평·진천·괴산·음성을 지역구로 두고 활동하고 있었다.  
“당신들 살 길만 찾지 말고!” 

나름 지역과 지역민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게 이 이야기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하루하루가 고단한 수많은 국민들에게 정치인들의 삶은 그것이 아무리 분주해 보일지라도 자신들 삶과는 괴리된 것이었다. 나 역시 그들의 삶이 아니라 내 살 길만 찾기 위해 분주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자괴감과 질문은 그 후 오랫동안 나를 떠나지 않았다.

오늘도 세상은 시끄럽다. 신임 장관 임명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란은 당사자들의 자진사퇴로 한 고비를 넘겼지만 국민들 마음에 앙금을 남겼다. 호르무즈 파병을 둘러싸고 보여줬던 정부의 애매한 태도는 이재명 대통령 기자회견으로 일단락됐지만 국민들은 여전히 한가닥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한때 천정부지로 치솟던 대통령 지지도는 지금은 끝 모를 내리막길을 치닫고 있다. 코스피가 몇천을 오르내리니, 반도체 수출액이 얼마가 됐느니 하고 호들갑을 떨지만 당장 거리로 나서면 곳곳에 붙어 있는 빈 점포들의 ‘임대’ 쪽지가 내 가슴을 휑하게 만든다. 정권은 바뀌었다지만 일반 국민들의 살림살이는 여전히 팍팍하다. 민심을 무시하고 ‘자신들만의 살 길’을 찾는 듯한 정권의 행태는 하락하는 민주당 지지율로 나타난다. 

국민들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인가? 따로 큰돈 안 들이고도 마음을 사는 방법 중 가장 좋은 것은 ‘인사’다. 오죽하면 “인사가 만사(萬事), 아니면 망사(亡事)”라고 했던가? 다른 진영의 인사를 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제대로 된 인사’를 쓰지 않는 게 문제다. 이혜훈, 김용남 등이 국민의힘 출신이라서 문제가 아니라 “하필 골라도 저런 인물을…”이란 탄식을 몰고 온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여론에 밀려 사퇴했지만, 최근 문제가 됐던 두 명의 장관 후보자도 “하필이면 꼭 저런 인물을?”이란 질문을 던지게 했다. 중도실용주의도 좋고 뉴이재명도 좋지만 국민의 공감을 사고 감동을 얻는 인물을 찾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내가 해봐서 아는데…” 현대건설 사장 출신으로 대통령이 됐던 이명박씨가 자주 했다는 말이다. 흔히 자수성가형 인물들에게서 보여지는 행태다. “임자, 해 봤어?” 이건 그의 ‘오너’였던 정주영 회장의 말버릇이었다. 모두 자신의 경험, 성공 스토리에 대한 자부심이 확신으로 굳어진 것이다.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를 거쳐 대통령에 당선된 이재명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는 처음에는 엄청난 국민의 환호를 불러왔다. 생방송으로 전달되는 그의 면모는 과연 시장과 도지사라는 풍부한 행정 경험이 녹아있는 정치지도자의 ‘현장 지도’답게 막힘이 없었다. 그리고 그 ‘지도’에는 밑바닥에서부터 맨손으로 올라온 ‘소년공’의 삶이 녹아있다. 

18일 진행된 이재명 대통령의 기자회견 모습. 연합뉴스 제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경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대통령 앞에서 공손한 자세로 열심히 ‘받아 쓰고’ 있는 각료들과 참모들의 모습은 과거부터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왔던 풍경이다. 국민주권정부에서도 여전히 ‘지시‘만 있지, 국민의 의사를 담는 치열한 ’토론‘은 없다.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이요, IT 강국인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은 모든 세세한 국정을 손수 챙기는, 이른바 만기친람(萬機親覽)의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될 수도 없다. 민심의 흐름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국민들이 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다각도로 살피는 것이 민주주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평소와 달리 웃음기 없이, 시종일관 진중한 표정으로 진행된 대통령의 최근 기자회견을 보면서 오래전 음성 장날에 만났던 한 어르신이 새삼 생각났다. “정치하는 사람들, 당신들 살 길만 찾지 말고”, 일하고 부대끼며 살고 있는 보통 사람들 살 길을 찾아달라는 현장의 요구는 여전히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