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섶 한조각 잘라 건넨 날, 부부의 인연도 끝이 났다

하전 박황희의 노변정담 (13) 할급휴서(割給休書) 서로 겹쳐져야할 겉섶과 안섶 중 한쪽 잘라내 이혼 은유적 표현 35냥에 아내 떠나보낸 남편의 눈물 ‘귀책 배우자’에 위자료 200냥 조선 이혼증서 ‘할급휴서’에 담긴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사 기록

2026-10-06     박황희 고려대 한문학과 겸임교수
(사진1) 조선시대의 이혼 합의문서. 최덕현이라는 사람이 작성했다고 알려진 수기. (원문) 痛矣, 胸其塞也. 夫婦有別, 惟人之第三大倫而無常. 妻同鋪糟糠, 不意今朝, 倍我而歸他, 則噫.彼二女將安歸而長成乎, 言念至此, 語不成而淚先. 然渠以我則我何思渠. 想其所為, 事當懷劍, 而惟不然者前程, 故十分恕來, 以葉錢三十五兩, 永爲罷送於右宅. 日後之弊, 持此文, 憑考事. 乙酉 十二月 二十日 최덕현 수표(手掌)

[고양신문] 중국 윈난성에는 지구상의 유일한 모계사회인 ‘모수오족’이 있다. 이들의 이혼 풍습은 매우 독특하다. 여성이 남편과 헤어지고 싶으면 나뭇잎 한 장을 남자의 손바닥에 얹어놓으면 그만이다. “당신의 사랑이 이 나뭇잎처럼 가벼워졌어요”라는 이별 선언이다. 천근 같은 사랑의 무게가 하찮은 깃털처럼 변했다는 뜻이다.

뜻밖의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조선 시대 이혼의 증서는 ‘옷섶’이었다. 부부의 한쪽이 옷섶을 잘라 상대방에게 주면 그날로 혼인 관계가 막을 내린다. 본래 옷섶은 옷 앞부분이 벌어지지 않게 여미는 역할을 한다. 서로 겹쳐져야 할 ‘겉섶’과 ‘안섶’ 중에 한쪽을 잘라냄으로써 서로 붙어 있어야 할 부부가 갈라섰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 사회에서 양반들에게는 이혼이 엄격히 통제되어 있어서 이혼하려면 먼저 왕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이에 반해 평민과 천민은 자율적인 합의이혼이 가능했다. 이혼 사유는 대부분 칠거지악이었는데, ‘사정파의(事情罷議)’라는 절차를 거쳤다. ‘사정파의’란 둘이 마주 앉아 이혼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말하고 서로 승낙하는 일종의 합의이혼을 말한다. 오늘날 협의이혼이 법원의 확인 절차를 거쳐 성립하는 것처럼, 당시의 사정파의 역시 당사자 간의 합의만으로 끝나는 사적인 약속이 아니었다. 마을 공동체와 친족, 그리고 필요할 경우 관청까지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도록 문서를 남겼다는 점에서 조선 사회가 문서에 의한 증빙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보여 준다. 이는 조선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관습만으로 운영된 사회가 아니라, 계약과 증빙을 생활 속에 깊이 정착시킨 ‘문서 사회’였음을 말해 주는 중요한 사례이기도 하다.

사정파의를 확정하면 남편이 상대방에게 깃저고리 조각을 베어서 주었는데 이를 ‘할급휴서(割給休書)’라 한다. 이혼의 증서인 깃저고리 조각을 우리말로는 ‘수세’라고 하며, 한자로는 ‘휴서(休書)’라 하였다. 섶의 모양이 나비와 비슷해 속칭 ‘나비’라고도 불렸다. 이 할급휴서를 가진 여성은 재혼할 수가 있었다. 특히 ‘할급(割給)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옷섶을 잘라 준다는 행위를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조선 시대 문서 용어에서 ‘할(割)’은 법률적 효력을 발생시키는 분할 행위를, ‘급(給)’은 상대방에게 권리를 이전하거나 증빙물을 교부하는 행위를 뜻한다. 따라서 ‘할급휴서’는 단순한 상징물이 아니라 혼인 관계 종료를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법적 효력을 지닌 증표였다. 이는 국가의 호적과 향촌 사회의 공동체 질서 안에서 재혼과 재산 관계, 신분 확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생활법의 중요한 실체를 보여 준다.

이렇게 이혼을 증빙하는 문서를 ‘각립지표(各立之標)’, 또는 ‘절의표지(絶誼標紙)’, ‘이연장(離緣狀)’, ‘기별명문(棄別明文)’ 등으로 표현하였는데, 조선 후기에 와서는 ‘할급휴서’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이혼을 ‘무상관(無相關)’, 곧 ‘서로 관계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한 것도 이채롭다.

대표적 이혼의 사유가 되었던 ‘칠거지악’이란,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불순구고(不順舅姑)’, 자식을 낳지 못하는 ‘무자(無子)’, 행실이 음탕한 ‘음행(淫行)’, 질투하는 ‘투기(妬忌)’, 나쁜 병이 있는 ‘악질(惡症)’, 말이 많은 ‘구설(口舌)’, 도둑질하는 ‘도절(盜竊)’ 등을 말한다. 다만 ‘삼불거(三不去)’라 해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다거나, 부모의 3년 상을 같이 치렀거나, 가난할 때 시집와서 집안을 일으킨 경우는 이혼하지 못하였다. 반대로 처가 이혼을 요구하려면, 남편이 집을 나가 3년 이상 행방불명되었거나, 남편이 처의 조부모·부모를 때리거나, 형제·자매를 죽이는 등 매우 한정된 경우에만 가능했다.

(사진1)의 문서는 최덕현이라는 사람이 작성했다고 알려진 ‘수기(手記)’이다. 수기는 ‘수표(手標)’라고도 하는데, 말 그대로 손으로 기록한 문서로서 어떤 물건을 매매하거나 기탁 또는 대차(貸借)할 때 주로 작성하였다. 더러는 약속이나 사건의 보증을 할 때도 일종의 증표로 작성하였는데, 여기서는 이혼을 허여하는 문서로써 사용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애통하구나. 가슴이 미어진다. 부부유별은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윤리 중 세 번째로 큰 윤리인데 무상(無常)하구나. 나의 아내는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동고동락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오늘 아침에 나를 배반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버렸으니 슬프다. 저 두 딸은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여 자랄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말이 나오기도 전에 눈물이 흐른다. 그러나 그녀가 나를 배신하였으니 어찌 내가 그녀를 생각하겠는가? 그녀가 나에게 한 행위를 생각하면 칼을 품고 가서 죽이는 것이 마땅한 일이나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장차 앞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분 생각하여 용서하고 엽전 35냥을 받고서 영원히 우리의 혼인 관계를 파기하고 위 댁(宅)으로 보낸다. 만일 뒷날 말썽이 일어나거든 이 수기를 가지고 증빙할 일이다.
을유년(乙酉) 12월 20일 최덕현 수표

위 수기는 1825년이나 1885년에 작성된 것으로 최덕현이 자기의 아내와 혼인 관계를 청산하고 어느 양반댁의 첩으로 들여보내면서 작성해 준 문기이다. 최덕현은 양반댁으로부터 일종의 이혼합의금 또는 이혼위자료 명목으로 35냥을 받았다. 

무엇보다 이 문서는 법률문서인 동시에 한 인간의 절절한 심정을 담은 기록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일반적인 고문서는 거래나 권리관계를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데 치중하지만, 이 문기에는 버림받은 남편의 슬픔과 두 딸을 향한 부정(父情), 분노와 체념이 한 편의 산문처럼 담겨 있다. 이러한 감정의 서술은 조선 후기 서민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드문 자료로 평가되며, 생활사뿐 아니라 감정사(Emotional History)를 연구하는 데에도 매우 귀중한 사료가 된다.

최덕현은 한자를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양반들이 하는 ‘수결(手決)’ 대신에 자기의 왼손을 그려 넣었다. 이를 ‘수장(手掌)’이라 하였으며, 손 마디를 그리는 것을 ‘수촌(手寸)’이라 하였다. 아마도 최덕현의 사정을 잘 아는 이웃 가운데 문자를 아는 사람이 대신 작성하였거나, 전문 대서인이 작성했을 가능성도 있다. 

최덕현이 자신의 이름 대신 손바닥을 그려 넣은 ‘수장(手掌)’ 역시 당시 문자 생활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조선 후기에는 문맹자가 적지 않았으므로 서명 대신 손바닥이나 손가락 마디를 그려 본인의 의사를 표시하는 사례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이러한 수촌과 수장은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 오늘날의 자필 서명이나 무인(拇印)에 해당하는 법적 효력을 지닌 본인 확인 방식이었다.

(사진2) 조선시대 임문숙이라는 사람이 그의 처 김씨의 행실을 문제 삼아 이혼하고자 만든 문서. (원문) 手標 癸卯年 月 日右標事, 本妻金氏內有不是之行, 故永爲薄待, 則淳在同居之弊, 永永無相關之意, 以此成標爲去乎, 錢二百兩許給, 則日後若有諸族中, 是非之端, 則以此文記, 告官事.標主任文淑訂筆盧元日 

(사진2)는 합의이혼 문서로서 임문숙이라는 사람이 그의 처 김씨의 행실을 문제 삼아서 이혼하고자 만든 문서이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오른쪽 수표의 일은, 본처 김씨 아내의 옳지 못한 행실이 있어, 내가 그녀를 영영 박대한다면 같이 사는 데 폐단이 있을 것이니, 영원히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에서 이 수표를 작성하고 돈 200냥을 주기로 한다. 차후에 만일 여러 친족이 이 문제로 다시 시비를 벌인다면, 이 문서로서 관청에 고한다.”

김씨의 옳지 못한 행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귀책 배우자’에게 거액의 위자료를 주었다. 이혼을 ‘무상관(無相關)’, 곧 ‘서로 관계하지 않겠다’라고 표현한 것도 흥미롭다. 선조들이 남긴 이 문서 한 장은 조선 시대 평민과 천민 여성들에게도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이혼과 재혼이 제도적으로 가능하였음을 보여준다. 흔히 조선을 절대적인 가부장 사회로만 이해하기 쉽지만, 실제 고문서를 들여다보면 법과 현실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회적 신분과 경제적 여건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혼인 역시 현실의 삶 속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인간의 관계였으며, 그 과정은 문서를 통해 공적으로 확인되었다.

고문서는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만든 문서가 아니다. 당시 사람들은 단지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남기기 위해 문서를 작성했을 뿐이다. 그러나 수백 년이 흐른 오늘날, 그 문서들은 오히려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과 감정, 법과 관습, 가족과 공동체의 모습을 가장 진실하게 증언하는 일차 사료가 되었다. 국가의 실록과 법전이 제도를 기록하였다면, 이러한 생활문서는 평범한 백성들의 삶을 기록하였다. 역사의 빈틈은 바로 이러한 문서들에 의해 비로소 메워진다.

더욱이 이혼이라는 문제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본질까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사랑으로 시작한 인연이 갈등과 상처 끝에 헤어짐으로 귀결되는 모습은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현대는 법원이 이혼을 확인하고 판결문이 그 역할을 대신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잘라낸 옷섶과 휴서 한 장이 그 기능을 수행하였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사람의 마음과 관계의 어려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이 문서는 조용히 말해 준다.

결국 ‘할급휴서’는 단순한 이혼증서가 아니라, 한 시대의 법문화와 생활문화, 가족제도와 인간의 감정을 함께 담아낸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고문서학의 관점에서 이러한 생활문서는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국가 기록이 미처 담아내지 못한 민중의 삶을 복원하는 가장 생생한 자료이며, 조선 사회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