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지 칼럼] 퇴고는 시간 낭비다

[예술 비슷한 거 하는 M세대의 글쓰기]

2026-10-14     김수지(노파) 작가

[고양신문] 추석 전날, 편집자가 제 소설 『개구리』의 표지 시안 몇 개와 조판본 파일을 보내왔습니다. 시안을 고르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혹시 출판사에서 으스스한 분위기의 개구리를 대문짝만하게 그려놓을까 봐 몇 달 전부터 설레발을 치며 요청한 내용들이 디자인에 잘 반영됐기 때문입니다. 표지를 정하는 일은 이토록 쉽고 간단했습니다. 왜냐하면 표지는 제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조판본입니다. 

김수지 작가의 중편소설 '개구리' 표지 시안. 

조판본은 책이 어떤 형태로 인쇄되어 나올지 미리 보여주는 가제본으로, 출판사에서는 인쇄 전 마지막 검토를 위해 작가에게 조판본 파일을 보냅니다. 보통 이 단계에서 큰 수정은 하지 않는데, 저는 보나 마나 한 번도 퇴고한 적 없는 사람처럼 고치고 있을 게 빤하므로 파일을 여는 게 망설여졌습니다. 그렇다고 안 볼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고칠 게 있다는 건 여전히 나아질 구석이 있다는 뜻이고, 그걸 알면서도 지나치는 작가는 없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한글 파일보다 3분의 1 수준으로 작아진 판형으로 본 소설은 많은 것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A4용지에선 보기 좋았던 문단의 크기가 조판본에선 너무 커서 읽는 호흡이 좋지 않았고, 또 그즈음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있던 것도 문제였습니다. 『개구리』와 분량이 비슷한 이 소설은 무려 11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덕에 읽기가 수월하고 보기도 훨씬 근사해 보였습니다. 역시 노벨상 받은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며 저는 『개구리』도 장을 나누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대대적인 수정이었지만 저는 추석에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 ‘사정 있는 사람’이고, 평소에도 주말 평일 구분 없이 지내는 데다가, 성격적으로는 집요하기 이를 데 없으므로 추석 연휴는 원고를 손보기에 아주 적절했습니다. 그렇게 장과 문단을 나누고, 너무도 사소하여 읽는 사람은 차이를 느낄 수도 없는 미세한 수정에 나흘간 매달렸더니 불현듯 이 모든 게 지독한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정 내용 중 상당수는 이미 지난 교정 때 고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미지출처=아이클릭아트

늘 그랬습니다. 퇴고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저는 조사와 어미의 경우의 수의 늪에 빠져 무의미해 보이는 수정을 무한히 반복합니다. 지난 번 퇴고 땐 A가 좋았으나 오늘은 그전에 쓴 B가 더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보면 또 A가 좋아 보여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겁니다. 정답은 없고 제 취향은 매번 미세하게 달라지니 ‘더 좋다’의 결론도 번번이 바뀌어 ‘그때는 좋았지만 지금은 아니다’의 무한 루프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그걸 몇 달째 하고 있으니 퇴고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지독한 시간 낭비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고작 손톱만큼 더 좋아지기 위해서는 터무니없이 많은 분량의 시간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글쓰기 역시 초고 단계에서는 이야기에 살을 붙이는 것만으로 성취를 느끼지만, 퇴고 단계에 들어서면 나아지는 기색 없이 제자리걸음만 하는 기분이 듭니다. 그러다 퇴고 막바지에 이르러 두 개의 어미, 두 개의 조사 사이에서 무한히 진동하다 보면 이 무의미한 퇴고를 영영 끝낼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바로 이 단계의 글이야말로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를 구현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사나 어미처럼 사소한 표현 외에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플롯이나 구성적 측면은 더 거슬리는 게 없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퇴고가 시간 낭비처럼 느껴진다면, 내가 지금 굉장히 중요한 단계를 넘어서는 중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듯합니다.

원래 정말 좋은 것들은 시간 낭비처럼 보이는 고민을 무수히 거듭한 끝에 얻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간 낭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청춘을 낭비하고 삶을 낭비하는 이유도 인생을 더 좋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퇴고도, 시간 낭비도 미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을 얻기 일보 직전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