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쳐 나와도 사라지지 않은 '외딴방 그녀들'의 기억
이인숙의 책속으로 떠나는 여행 (17) 신경숙 <외딴방> “난 너희들과 달라” 헤겔을 읽던 반장 노동운동하다 온몸 묶인채 구타당한 미스리 조그만 단어장을 손에 꼭 쥐던 버스 안내양 희재 언니 죽음과 화해하며 되살아난 가리봉동 서른일곱 개 외딴방 사람들 그녀들이 꿈꾸던 세상은 무엇이었나
[고양신문] 오래전 『외딴방』을 처음 읽었을 때 가슴 저릿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책을 펼쳤다.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라는 첫머리의 말처럼 『외딴방』은 소설의 옷을 입은 신경숙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면서 함께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 학교를 다녔던 수많은 ‘그녀’들의 이야기이다. 유명작가가 된 ‘나’에게 어느 날 걸려온 공장 시절 옛친구의 전화, 너는 우리 얘기는 쓰지 않더구나.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걸 부끄러워 하는 건 아니니? 넌, 우리들하고 다른 삶을 사는 것 같더라. 작가는 그 시절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가슴이 마구 아파서 쓸 수가 없었다고 고백하면서 어렵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1978년 서울에 올라와 열여섯부터 열아홉 살까지 지냈던 구로공단의 공장과 산업체 특별학급, 그리고 서른일곱 개의 방 가운데 하나인 외딴방에서 살던 “그 사 년의 삶과 나는 좀처럼 화해가 되지 않았다.” 왜일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오빠와 외사촌과 함께 살던 좁은 방과 다락에 갇힌 듯한 막막함 등이 떠오르지만 무엇보다도 “턱하니 희재언니의 모습이 나를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희재언니의 죽음에 자신도 모르게 연루됐던 충격이 그때의 일을 글로 쓸 수 없게 만들었다. 작가는 “유신말기 산업역군의 풍속화”였던 우리와 희재언니의 이야기를 19년 전 과거와 글을 쓰고 있는 현재를 오가며 힘겹게 한 줄씩 이어간다. 글쓰기가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때가 지나간 시간이 되지 못하고 “낙타의 혹처럼 내 등에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업역군의 풍속화’에는 말도 안 되는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 온갖 난관 속에서 노조를 결성하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정부와 회사 측의 집요한 노조 탄압, 여공을 유혹하는 생산계장의 비열한 횡포 등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1930년대 강경애의 『인간문제』에 나타난 여공들의 상황과 한치도 다르지 않은 1970~80년대의 노동현장은 50년 세월을 무색하게 한다. ‘나’의 시골집은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았다. 어머니는 명절마다 아이들에게 새옷을 해 입혔고 어느 집보다 음식이 풍부했으며, 동네에서 가장 넓은 마당에 닭이며 오리 등이 다른 집보다 많았다. “그런데 도시로 나오니 하층민이다.” 농촌의 희생을 전제로 한 산업화 정책, 그 바탕에 저임금이 있었다. “저임금이란 말이 주는 가슴 저림. 저임금, 저임금…… 내가 기억하는 우리들의 급료는 사실이었을까.” ‘나’는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78년도 노동상황을 알아본다. 견습공 최저임금은 2만4000원, 중식비, 교통비를 제하면 일당 오륙백원, 월평균 임금은 1만9400원, “그들은 그 돈을 받아서 자취도 하고 시골로도 부치고 동생을 데리고 살기도 했는데…… ”
노조 결성에 앞장섰던 유채옥은 해고당하고, ‘나’와 외사촌은 산업체 특별학급에 들어가기 위해 죄책감을 무릅쓰고 노조를 탈퇴한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약간의 성과를 거두지만 해고된 지부장 유채옥은 복직되지 않는다. 말 안 듣는 노조원을 성적으로 유린한 생산과장에 대한 항의로 알몸으로 옥상에 올라가 시위하는 여성노동자들, 가발공장 YH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 김경숙의 죽음 등 70년대의 치열했던 여성노동운동이 노동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살아난다.
풍속화에는 1979년 산업체특별학급에 들어간 ‘나’와 외사촌, 저녁 시간에 형광등 불빛 아래 앉아 졸면서 배우던 ‘그녀들’이 있다. 언젠가 내가 그녀들을 내 친구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때, 그때 언니와 그녀들에게 사회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의젓한 자리를 만들어주고 싶다고 작가는 다짐한다. ‘나’는 글쓰는 사람이, 외사촌은 사진찍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공장노동자인 두 사람의 꿈이 남다르지만, 다른 ‘그녀들’이라고 해서 꿈이 없었을까. 나는 너희들과 달라, 하면서 늘 헤겔 책을 읽는 반장 미서, 내가 다치지 않도록 잘못을 감싸주던 윤순임, 열심히 노조운동 하던 미스 리는 손발이 묶인 채 취조실 지하계단에서 발로 걷어차여 병석에 누워있다. 오후 다섯 시에 학교 가는 버스를 타면 버스 안내양의 손에 주사위만한 영어 단어장이 쥐어져 있기도 했다. 이들 가난한 딸들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조세희의 『난쏘공』을 옮겨적고 시를 옮겨쓰며 그 시간들을 버텨낸다. 그리고 작가가 되어 흔히 공순이라는 멸칭으로 불렸던 여성노동자들에게 인간적인 위엄을 찾아준다.
무엇보다도 희재언니, 희미한 웃음과 피로한 눈매 창백한 그늘로 포착되는 그녀, 옥상에서 함께 빨래를 널고 외사촌이 질투할 만큼 좋아했던 희재언니의 이야기가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한다. 그만큼 쓰기가 고통스러운 것이다. 희재언니에 대한 원망과 사무침, 나도 모르게 그녀의 죽음을 방조했던 충격으로 계속 머뭇거리는 글쓰기,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좀처럼 진행되지 않는 그 머뭇거림이 희미한 미소와 함께 지워지지 않을 인상을 남긴다. ‘나’는 도시의 노동자가 되었지만 큰오빠라는 든든한 보호자가 있었고, 고향에는 ‘나’를 극진히 사랑해주는 부모와 형제들이 있었다. 그래서 삭막하고 가난한 도시의 공장생활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활은 따스함과 안정감이 있었다. 그것은 그 시절 대부분의 ‘그녀들’과 다른 지점이다. 외딴방이 있던 좁고 더러운 골목, 외사촌과 ‘나’는 그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사년 후에 그들은 그곳을 떠났고 ‘나’는 유명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희재언니는 아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그 골목이다. 그곳의 전신주이고 구토물이고 여관이다. 그녀는 공장 굴뚝이며 어두운 시장이며 재봉틀이다. 서른일곱 개의 외딴방들이 그녀, 생의 장소다.” 시골의 남동생을 데려오기 위해 낮에는 공장, 밤에는 의상실 일을 하던 그녀는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전형이었다. 힘겹고 지친 나날들, 바싹 말라버린 꽃잎처럼 맥없는 목소리만 남은 그녀. 작가는 한참을 에둘러서 돌고 돌아 마침내 희재언니의 죽음에 이른다. 그 충격으로 외딴방을 뛰쳐나와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았고, 우연히 구로공단이 있는 전철역을 지나게 되면 날쌘 통증이 전철보다 앞질러갔다고.
『외딴방』에는 또한 농촌 출신 장남의 고단함이 곳곳에 배어있다. 낮에는 동사무소, 밤에는 대학을 다니는 큰오빠, 대학을 졸업하고 방위병이 되어서도 가발을 쓰고 새벽에 학원강사로 나가는 오빠, 멀리 떨어진 부모 대신 동생들을 보살펴야 하는 “피로한 장남의 발걸음, 겨우 스물다섯 나이로 한 가족을 짊어진 가엾은 청년의 발걸음”이 외롭다. 법대에 들어간 셋째오빠는 큰오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운동권에 뛰어든다. 가방에서 독재타도 유신철폐 유인물이 나오고 옷에는 최루탄 냄새가 배어있다. 한동안 사라졌다가 불편해진 다리와 곳곳에 시퍼런 멍이 든 몸으로 돌아온다. 그만하길 다행이라는 큰오빠.
1978년 유신말기에 시작된 소설은 박정희 사망과 서울의 봄, 신군부의 군사반란, 광주 5·18 등 굵직한 현대사의 격동의 시간과 함께 한다. 고향인 화순에 가려고 광주행 기차를 탔던 짝 안향숙이 칠팔일 만에 나타나 쉬쉬하며 들려주는 말, “광주는 완전히 폐쇄됐어. 피바다야.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게 해.” 선생님도 아무도 자기 말을 믿지 않는다며 “서울은 어쩌면 이렇게 조용하니.” 그녀의 말대로 5·18 직후 서울은 조용했고 암암리에 소문으로만 돌던 광주의 진상이 밝혀진 건 훨씬 뒤의 일이었다. 전두환의 악행이 극에 달했던 삼청교육대, 새 노조지부장도, ‘나’와 외사촌에게 늘 친절했던 얼굴에 칼자국이 있던 가겟집 아저씨도 무슨 순화교육 받는다고 어디론가 끌려간다. 그리고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의 증언이 이어진다. 침묵으로 묵살해버렸던 소녀시절, 기억하지 않으려 했던 그녀들과 희재언니의 이야기를 힘겹게 풀어낸 작가는 시대를 증언하는 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지하철이 가리봉역을 지날 때면 멀리 공장 굴뚝이 울뚝불뚝 솟아있는 그곳을 ‘나’는 눈을 부릅뜨고 내다본다. 글쓰기를 통해 마침내 희재언니의 죽음과 화해한 작가는 도망치듯 빠져나온 외딴방을 이제는 온전히 바라본다. ‘나’와 그녀들이 일하던 구로공단은 지금 가산디지털단지가 되었고 ‘외딴집’이 있던 가리봉역의 이름도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