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지 칼럼] 읽히는 여행 에세이에만 있는 것

예술 비슷한 거 하는 M세대의 글쓰기

2026-10-30     김수지(노파) 작가
예산 덕숭산 자락에 자리한 수덕사 정혜사. 사진 김수지

[고양신문] 저는 지금 예산입니다. 벌써 5일째 예산의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중입니다. 쓸만한 아이디어가 떨어졌다고 하면 흔히들 지금 있는 곳을 벗어나 새로운 장소로 여행을 떠나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떠나왔습니다만, 막상 노트북을 켜니 무슨 내용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이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방문한 관광지와 먹은 음식에 관해 쓰자니 다른 사람들도 재밌어할지 의문입니다. 당연히 재미없습니다. 나는 어제와 다름없는 고된 하루를 보냈는데, 누구는 여행지에서 맛깔나게 먹고 놀았다는 글이 재밌게 읽힐 리 없습니다. 

그런데 작가들의 여행기는 다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는 지금 그리스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겐 어떤 유용한 정보도 주지 못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하루키가 본 40년 전 그리스를 흥미롭게 읽어 내려갑니다. 독자가 여행기에서 기대하는 게 단순한 관광 정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은 작가만의 고유한 시선을 읽고 싶어합니다. 대부분은 지나칠 법한 사소한 것들을 포착해 내는 섬세하고 날카로운 시선과 보통은 귀찮고 힘들어서 하지 않을 법한 일들을 기어이 해내고 마는 모험 정신까지, 읽히는 여행기에는 이런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건, 이런 글을 쓰기 위해 모두가 대단한 모험가가 될 필요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저 오늘 여행지에서 유달리 인상 깊었던 순간을 잘 기억해 놨다가 왜 그 순간이 내게 인상적이었는지, 자신만의 이유를 글 속에서 찾아가면 됩니다. 그렇게 찾아낸 이유가 바로 나만의 고유한 시선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출렁다리인 예당호 출렁다리. 사진 김수지

예를 들어 제가 예산에 와서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사람들의 유별난 관대함입니다. 일산이라면 결코 허용되지 않을 일들이 벌어졌을 때, 이를테면 왕복 2차선 도로에서 맞은편 차선까지 침범하는 거대한 컨테이너 하우스를 실은 화물차가 연달아 달려올 때, 혹은 코너를 돌았는데 길 한가운데 지게차가 떡하니 멈춰 서 있을 때, 이곳 사람들은 누구도 경적을 울리지 않습니다. 그저 차를 갓길에 붙인 채 오들오들 떨고 있으면 알아서 화물차가 지나가고, 멈춰 선 지게차는 제 쪽에서 알아서 중앙선을 넘어 피해 가면 됩니다. 이런 관대함은 상호적인 것이어서 제가 어리숙하게 운전하거나 엉망으로 주차해도 누구도 경적을 누르지 않습니다. 그저 조용히 지나갈 뿐입니다.

이런 느긋함과 관대함이 도시 전체를 휘감은 듯한 곳에서 며칠을 보내니 저의 별스러운 예민함도 무뎌지는 기분입니다. 예산의 명산인 가야산을 등산할 때 길이 정비가 안 된 탓에 갖은 고생을 하며 겨우 능선으로 올랐더니 제가 막 빠져나온 진출로에 출입 금지 팻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홍수 피해로 길이 정비되지 않아 등산로를 잠시 폐쇄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평소라면 이런 중요한 내용은 등산로 초입에서 알려야 하는 거 아니냐며 분통을 터뜨렸겠지만, 저는 이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유유히 돌아섰습니다. 예산의 관대함이 제 몸 안에 스며든 까닭입니다. 

예산의 명산인 가야산 정상에서 차린 점심. 사진 김수지

소설적 상상력이 샘솟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예산이 온천으로 유명하다길래 30년 만에 온천장에 갔다가 그곳에서 백 킬로쯤 돼 보이는 여인을 본 순간, 아름다움의 기준이 마른 몸에 있는 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도처럼 유려하면서도 단단한 질감을 지닌 완벽한 살의 곡률을 보고 있자니 문득 고래라고 불리운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사람들은 여자가 골목 어귀에 나타날 때마다 거대한 아름다움이 물결쳐 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이 우아하고 풍만한 아름다움을 향해 ‘고래야’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천명관 작가가 이미 비슷한 소재로 소설을 쓴 바 있고, 그 소설은 맨부커상 최종 후보까지 올랐으므로, 우연히 소재가 겹친 거라고 잡아뗄 수도 없으므로 버리고 나왔습니다.  

소재는 아쉽지만 낯선 장소에서 새로운 시선으로 인간과 사물을 보며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상상하는 경험은 글을 쓰는 사람에겐 더없이 소중합니다. 그러니 글감이 떨어졌다면 노트북을 들고 새로운 장소로 떠나보기 바랍니다. 그곳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으로 한 세계를 써 내려가기 바랍니다. 

예산성당 보수 공사 중인 인부. 사진 김수지
향천사 근처 맨발 걷기 황톳길. 사진 김수지
카페에서 칼럼을 쓸 때 나타난 고양이 가족. 사진 김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