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오릉의 두 여인, 300년 건너 무대에서 피어나다

창작공연 '서오릉 숙종의 여인들'

2026-11-03     조문주 시민기자

춤과 국악, AI 영상으로 다채로운 연출
장애·비장애 예술인 함께한 감동의 무대
“고양 역사문화자원 확장 가능성 제시”

80대 원로 계영자 무용가가 선보인 승무. 김혜란빛고운춤무용단  제공

[고양신문] 무대 위 커다란 스크린에 고양 서오릉의 풍경이 펼쳐졌다. 시간을 거슬러 조선시대로 향했던 화면은 어느 순간 세월을 건너 현재의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으로 관객을 데려왔다. 객석에 앉아 있지만 마치 300여 년의 시간을 함께 여행하는 듯했다. 고양의 역사문화유산인 서오릉을 모티브로 한 창작공연 <서오릉, 전통(全通)으로 피어나다-서오릉 숙종의 여인들>이 지난 31일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 무대에 올랐다.

2026년 모두예술극장 장애예술 활성화 지원사업 선정작인 이번 공연은 서오릉에 잠든 숙종과 인현왕후, 장희빈의 이야기를 춤과 국악, 연극적 표현에 AI 영상까지 결합해 풀어낸 창작공연이다. 공연은 익숙한 역사 속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단순한 권력 다툼의 두 여인으로 그리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등장해 아직 왕실의 권력과 비극적인 운명을 알지 못했던 순수한 시간을 보여준다. 두 아이의 천진한 모습은 시간이 흐르며 성인이 된 두 여인으로 이어지고,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는 두 사람의 운명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특히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내면’을 별도의 배역으로 등장시킨 연출이 눈길을 끌었다. 역사에 기록된 왕비와 후궁의 모습, 그 안에 숨겨진 사랑과 질투, 두려움과 욕망, 상처를 또 다른 인물의 춤과 몸짓으로 표현했다. 겉으로 드러난 인물과 내면의 자아가 한 무대에서 교차하면서 두 여성의 삶이 입체적으로 살아났다.

발달장애 연주자들로 구성된 국악예술단 '손울림'의 무대. 김혜란빛고운춤무용단 제공

공연의 문은 국악예술단 손울림이 열었다. 발달장애 연주자들로 구성된 손울림은 여러 국악기를 능숙하게 다루며 서로의 호흡을 맞춰 완성한 안정적인 연주를 들려줬다. 살풀이 장면에서는 비버데프예술단 김영민 단장의 춤이 깊은 여운을 남겼다. 어린 시절부터 청각장애를 가진 김 단장은 오랫동안 무용을 이어온 예술가다. 음악을 들을 수 없지만 섬세한 호흡과 아름다운 춤선으로 무대를 채웠다. 이처럼 장애예술인과 비장애예술인은 국악과 무용, 연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한 작품 안에서 호흡했다. 장애 여부보다 각 예술가의 연주와 춤, 그리고 작품 자체에 집중하게 되는 무대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작품의 몰입도를 한층 높인 것은 AI를 활용한 영상이었다. 영상은 단순한 무대 배경을 넘어 공연의 시간과 공간을 움직이는 장치로 활용됐다. 서오릉에서 출발한 화면은 조선시대와 근현대를 지나 현재의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까지 이어졌다. 특히 영상 속 시간이 현재의 공연장으로 도착하는 순간 실제 객석과 스크린 속 공간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관객도 배우들과 함께 조선시대에서 현재의 고양까지 시간을 건너온 듯했다. 무대와 영상이 이어지는 장면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몰입감을 더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어린 시절을 어린 무용수의 춤으로 표현했다. 김혜란빛고운춤무용단 제공

공연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 것은 예술가들의 폭넓은 세대였다. 어린 무용수부터 오랜 세월 춤의 길을 걸어온 원로 무용가까지 한 무대에 올라 각자의 몸에 담긴 시간을 춤으로 풀어냈다. 특히 80대의 나이에도 무대에 오른 계영자의 승무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흰 장삼 자락이 무대 위에서 길게 펼쳐질 때마다 오랜 시간 다져온 춤의 내공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빠르고 화려한 동작보다 절제된 몸짓과 호흡에서 한국 전통춤 특유의 깊이가 묻어났다.

긴 이야기를 마친 인물들이 다시 서오릉으로 향하는 마지막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서오릉에 잠들어 있던 역사 속 인물들이 잠시 무대 위로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뒤 다시 긴 시간 속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서오릉에서 시작해 다시 서오릉으로 돌아가는 구성은 작품의 처음과 끝을 하나로 연결했다.

김혜란빛고운춤무용단 제공

이번 공연은 고양의 역사문화자원을 현대 공연예술로 확장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세계유산 서오릉에 잠든 인물들의 이야기에 국악과 무용, 연극적 표현과 현대 영상기술을 더해 오래된 역사를 오늘의 무대언어로 되살렸다.

한 번의 공연으로 끝내기에는 아쉬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품을 더욱 다듬어 실제 서오릉과 연계하고 고양의 역사와 장소성을 깊이 담아낸다면 ‘고양에서 만나는 고양의 이야기’로 성장할 수 있고, 지역을 찾는 관광객에게도 고양의 역사와 문화를 색다르게 전하는 창작콘텐츠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300여 년 전 서로 다른 운명을 살았던 두 여인의 이야기는 그렇게 고양의 무대에서 다시 피어났다. 오래된 역사가 오늘의 예술과 만날 때 지역의 문화유산은 또 다른 생명력을 얻는다. <서오릉, 전통으로 피어나다>가 고양에서 이어갈 다음 무대가 기대되는 이유다.

김혜란빛고운춤무용단 제공
김혜란빛고운춤무용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