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불타는 파리의 거리, 불 꺼진 한국의 공단이 보내는 신호

빚으로 쌓는 복지 넘어 일자리로 돌아오는 복지로, 이제 법이 응답할 때다

2026-11-05     권영기 더채움 대표이사(중부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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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신문] 지난 9월 말 파리에서 교사 부족과 노후 학교, 불공정한 입시제도에 대한 항의로 시작된 고등학생들의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고, 10월에는 생활비 부담을 둘러싼 대규모 시위와 맞물렸다. 벨기에, 이탈리아, 포르투갈에서도 거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복지국가의 대명사라던 유럽에서 청년들은 물었다. “이렇게 잘사는 나라에서, 왜 우리에게는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까.”

IT분야에서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는 전하진 님은 얼마 전 ‘영글어 가는 사회’라는 글에서 ‘성장은 크기를 키우는 일이고, 성숙은 그 크기가 세상을 살리도록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세포도 끝없이 증식하지 않고 제 기능을 갖추며 멈출 때를 안다. 그 제어를 잃은 세포가 암세포다. 방향을 잃은 성장은 자신을 키워 준 몸을 해친다.

공장 잃은 유럽 복지의 경고
유럽의 위기는 복지가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복지를 떠받칠 기반이 약해진 데서 왔다. 프랑스의 국채 차입 비용은 20여 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올랐다. 빚으로 쌓은 복지의 청구서를 받아 든 이들이 다름아닌 지금 거리에 선 청년들이다.

또 하나는 공장이다. 미국과 유럽은 생산을 아시아로 넘기고 금융과 서비스로 먹고살겠다고 했다. 공장이 떠나자 좋은 일자리가 사라졌고, 세금을 낼 일자리가 줄며 복지 재원도 약해졌다. 지금 미국은 막대한 보조금으로 공장을 되돌리려 하지만, 사라진 숙련 인력과 부품 생태계를 다시 세우는 일이 얼마나 비싼지 확인하고 있다. 복지는 일자리에서 나오고, 좋은 일자리는 만드는 산업에서 나온다.

지난 8월 전체 취업자가 18만 4000명 늘어나는 동안 청년층 취업자는 14만 3000명이 줄었다. 수도권 공단을 돌아보면 이유가 보인다. 공장 담벼락마다 ‘임대’ 현수막이 걸려 있고, 중고 기계상 마당에는 주인을 잃은 설비가 줄지어 서 있다. 대표들은 말한다. “사람은 안 구해지고, 이자는 무섭고, 납품단가는 그대로입니다. 차라리 베트남으로 나가겠습니다.”

7월 말 중소법인 대출 연체율은 1.00%까지 올랐다. 영업이익률이 3~4%에 그치는 제조 중소기업에는 4%대 금리도 이자 부담이 영업이익을 크게 잠식할 수 있다. 해외로 나가도 답은 없다. 베트남은 올해 최저임금을 평균 7.2% 올렸다. 무엇보다 한 번 나간 공장은 돌아오지 않는다. 유턴법 시행 후 11년간 돌아온 기업은 한 해 평균 12곳에 불과하다.

영업이익률이 3~4%에 그치는 제조 중소기업에는 4%대 금리도 이자 부담이 영업이익을 크게 잠식할 수 있다.

국가가 청년 전문직업인 육성 나서야
공장에는 사람이 없고, 청년에게는 일자리가 없다. 이 엇갈림을 풀지 못하면 어떤 금융 지원도 공장을 살리지 못한다.

그래서 조금은 과감해 보일 제안을 하려고 한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청년을 국가가 다시 교육하고, 교육받는 동안에도 생활할 수 있는 급여를 지급해 산업 현장이 필요로 하는 직업인으로 길러 내야 한다. 지금도 구직촉진 수당이 있지만 월 60만 원, 최장 6개월이다. 이 돈으로는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하고, 더 문제인 것은 용접·설비보전·스마트공장 운영 같은 숙련 기술은 6개월 만에 익혀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일은 학교와 기업을 오가는 이원화 직업교육으로 제조 강국의 인력 기반을 지켜 왔다. 우리도 교육 기간을 최장 1년으로 늘리고 최저임금에 가까운 훈련 수당을 지급하면서 실제 공장과 연계해 수료와 동시에 취업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 그 청년을 채용해 2년 이상 근속시키는 중소 제조기업에는 인건비와 이자 부담을 함께 덜어주자. 청년은 기술을, 공장은 사람을, 국가는 세금을 낼 일자리를 얻게 된다. 빚으로 쌓는 복지가 아니라 일자리로 돌아오는 복지정책을 펴자.

청년과 제조업을 살리는 법·제도 개편
첫째, 청년 유급 재교육을 법으로 만들어야 한다. 구직자 취업 촉진법을 고쳐 훈련 수당의 수준과 기간을 늘리고, 일학습병행법을 확대해 기업 현장 훈련을 정식 교육과정으로 인정해야 한다. 고용보험 미가입 청년도 대상이 되도록 일반회계 재원을 명시해야 한다.

둘째, 국내에서 만드는 기업에 대한 지원을 법률로 굳혀야 한다. 이차보전은 해마다 예산에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국내에서 생산하고 고용하는 제조 중소기업의 이자 지원과 10년 이상 장기 설비자금을 법에 명시해야 기업이 멀리 보고 투자한다. 정부가 은행 금리를 직접 정할 수는 없지만, 정책금융기관의 역할과 재원은 법으로 키울 수 있다. 수출 실적이 아닌 국내 투자와 고용을 조건으로 하되 국제 통상규범과 충돌하지 않도록 제도를 설계하면 된다.

셋째, 정년 연장은 임금체계 특례와 한 묶음이어야 한다. 지금의 근로기준법으로는 근로자 과반의 동의 없이 임금체계를 바꿀 수 없다. 노동계의 우려를 존중하되 정년 연장 대상자에 한해 한시적으로 임금체계를 조정할 특례를 함께 담아야 그 비용이 청년 채용 축소로 돌아오지 않는다.

넷째, 유턴법과 외국인 숙련 인력 제도를 현실에 맞게 고쳐야 한다. 해외 공장을 다 정리하지 않아도 국내 증설만으로 지원받게 문턱을 낮추고, 숙련 기능인력 전환 쿼터를 늘려 기술을 익힌 근로자가 공장에 남게 해야 한다.

혁신 없이 연명만 하는 기업까지 세금으로 떠받치자는 것이 아니다. 선별은 엄격하게, 지원은 과감하게 하자는 것이다.

신입 채용은 비용 아닌 투자다
기업도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다시 물어야 한다. 신입사원 채용은 비용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투자다. 대기업의 이익은 협력사의 납품단가와 임금으로 이어져야 한다. 같은 제품을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서는 해외 공장과 경쟁에서 이길 수 없다. 작은 공정 하나라도 자동화하고 우리만의 품질을 갖춰 국가가 길러낸 청년이 들어와 성장할 수 있는 공장이 돼야 한다.

권영기 더채움 대표이사(중부대학교 겸임교수)

파리 고교생들의 외침과 한국 공단의 꺼진 불빛이 보내는 신호는 똑같다. 성장이 방향을 잃으면 그 성장을 이룬 기반부터 무너진다는 신호다. 청년에게 기술을, 공장에 사람을, 기업에 버틸 시간을 주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법을 고치는 것. 그것이 우리 경제가 영글어 가는 길이자 미래가 있는 대한민국으로 가는 길이다.

권영기 더채움 대표이사(중부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