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나들이] 파주 조리읍 송암마을

한적했던 솔바위골, 종전 후 미군부대마을 ‘북적’
미군 빠져나가고 20여 년, 여전히 남은 흔적들
주민들 의기투합, 마을전시관 열고 카페도 운영  

20여 년 전까지 미군부대가 자리하고 있었던 봉일천4리 송암마을 진입도로. 
20여 년 전까지 미군부대가 자리하고 있었던 봉일천4리 송암마을 진입도로. 

[고양신문] 연말 기분을 내고 싶어서 오래간만에 집 안 곳곳에 굴러다니는 책들을 정리했다. 소장 가치가 있는 책들은 책장에 자리를 잡아주고, 다시 들출 일 없을 것 같은 책들은 가차없이 폐지상자에 던지고, 아직 읽지 못한 책들 사이에서 눈이 가는 책들은 따로 골라냈다. 그렇게 ‘재발견’된 책들 중 하나가 『파주에 살다, 기억하다』(2019)이다. 파주시중앙도서관이 펴낸 이 책은 도서관에서 활동하는 시민채록단이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4리 어르신들의 구술(口述)을 정리한 기록물이다. 

책을 만든 이들이 봉일천4리에 주목한 이유가 있다. 솔바위골, 또는 송암마을로 불렸던 한적했던 농촌 마을이 한국전쟁 이후 미군기지가 들어서며 우리나라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끌어안은 동네가 됐기 때문이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돈과 물건들은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일자리가 있었고 다양한 업종의 가게들이 번성했다. 하지만 2000년대 초 미군기지가 반환되면서 급격한 쇠락을 맞았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시간이 멈춰버린 풍경들이 골목 곳곳에 도시화석처럼 남아있는 마을이 됐다.  

‘가슴에 묻고 눈에 새긴 나의 봉일천’이라는 챕터 제목이 말해주듯, 책은 미군부대 하우스보이, 사진기사, 세탁공장 인부 등 다양한 업종에서 일했던 이들의 회고담을 통해 이곳에 터 잡고 살아온 사람들과 마을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오래된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송암마을 골목길. 뒤편으로 봉일천 시내 아파트단지가 보인다.  
오래된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송암마을 골목길. 뒤편으로 봉일천 시내 아파트단지가 보인다.  

시간이 멈춰선 오래된 풍경들 

무심히 지나쳤던 통일로변의 작은 마을, 이야기의 무대인 미군부대 앞 마을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주말 오후 시간에 송암마을을 찾았다. 봉일천4리는 고양시 시계인 내유동과 불과 2㎞ 떨어져 있다. 동북쪽 뒷산이 파주 삼릉(三陵, 공·순·영릉) 숲이고, 조리읍 시가지와도 지천의 거리다. 

마을은 통일로에서 사단입구까지 이어진 길과, 작은 개울을 따라 이어진 길이 T자 형태로 만나는 구조다. 천변길의 서쪽 끝에서 송암마을 산책을 시작했다. 초입부터 80년대 무렵 지어진 양옥집과 이층집, 좀 더 예전에 지어졌을 법한 기와집이 뒤섞여있다. 마당 없이, 현관문을 열면 바로 도로로 연결되도록 지은 집들도 적지 않은데, 특이하게도 뒤쪽은 낮은 기와집인데 길가 쪽 지붕만 세로로 높게 양옥지붕처럼 꾸민 집도 보인다. 70년대, 정부에서 통일로 주변 가옥의 경관정리를 강요하던 시절이 낳은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전통 불한증막’이라는 간판과 함께 돌과 시멘트로 에스키모 이글루처럼 봉긋하게 만든 구조물도 보이고, 골목 안쪽에는 합판에 손글씨로 쓴 교회 간판이 걸려있고, 단층 건물 위에 아래층보다 바닥을 더 넓게 만들어 2층을 증축한 가분수같은 블록집도 눈길을 끈다. 하나같이 요즘 도시공간에서는 만나보기 힘든 풍경들이다.  

1층보다 2층 바닥을 더 넓게 증축한, 특이한 모양을 한 벽돌집.  
1층보다 2층 바닥을 더 넓게 증축한, 특이한 모양을 한 벽돌집.  

영문으로 적힌 클럽·마트 간판들

좀 더 걸어가니, 본격적으로 상가형 건물들이 마주보고 있는 골목이 시작된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골목 방향으로 문과 창문을 낸 것으로 보아, 한때는 비슷한 규모의 가게들이 줄지어 영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담배’라는 간판이 달려 있는 집들도 서너 곳 보았는데, 아마도 작은 슈퍼였던 것 같다. 전반적으로 낙후된 골목이지만, 의외로 최근에 화사하게 페인트칠을 한 집들이 많다. 따뜻한 살구색과 산뜻한 파란색을 기본으로 한 덕분에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 정겨운 색감이 사진에 담긴다.    

미군부대 입구가 가까워지자 ‘77CLUB’ ‘POP′S CLUB’ 과 같은, 골목의 성격을 보여주는 간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미군들의 발걸음으로 북적였던 시절을 담고 있는 도시화석같은 흔적들이다. 

그런가 하면 ‘88마트’는 영문으로 ‘OTSO OTSO MART’라고 표기했는데, 찾아보니 ‘OTSO’가 타갈로그어(필리핀 제2국어)로 숫자 8을 뜻한다고 한다. 간판 중에는 ‘FILIPINO FOOD’라고 적힌 식당도 있다. 아마도 미군부대가 빠져나간 후 주거비가 저렴한 마을을 찾아온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이 골목길의 새 식구들이 된 모양이다. 

살구색과 파란색이 산뜻한 조화를 이루는 옛 상가 골목길. 
살구색과 파란색이 산뜻한 조화를 이루는 옛 상가 골목길. 

불야성 이뤘을 메인 스트리트

골목길이 끝나면 너른 농경지를 마주한, 과거 미군부대의 경계인 긴 담벼락이 나온다. 노란 마을버스가 회차를 하는 정류장의 이름은 여전히 ‘사단앞(Division Front)’이다. 예전에 있던 건물이 사라졌어도, 주민들의 입에 붙은 정류장 이름을 웬만하면 바꾸지 않는 모습은 마을나들이를 하며 자주 목격하는 관행이다. 옛 상업거리 골목은 정류장 반대편 마을 동쪽으로도 한동안 이어진다. 이곳에서도 작은 미용실은 ‘센츄리 미용실’이라는 글로벌한 이름을 달고 있다.  

이제 사단앞 정류장에서 통일로로 이어지는, 송암마을의 메인스트리트를 걸어보자. 길이가 200m에 불과한 이 길에서는 한때 영화를 누렸던 클럽 건물들이 여전히 간판을 달고 있다. 출입문 지붕이 삼각형인 ‘Moon CLUB’, 메리크리스마스 글씨가 붙어있는 출입문 지붕이 아치형인 클럽, 간판에 스페이드와 하트가 그려져 있는 ‘ACE CLUB’, 성조기의 별이 둘러져 있는 ‘PARADISE CLUB’, 붉은 벽돌 현관에 기와지붕을 얹은 ‘ELVIS CLUB’을 차례로 만나볼 수 있다. 클럽 간판이 없는 건물들도 과거 이런저런 점포와 매장들이 영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밤이 되면 불야성을 이뤘을 시절이 자연스레 연상된다.  

영문 이름을 단 클럽 간판들. 
영문 이름을 단 클럽 간판들. 

전시관에서 만난 아련한 감동 

메인스트리트 끄트머리, 통일로에서 진입하면 다리 건너 마을 초입지점에 송암마을 나들이를 시작, 또는 마무리하기에 안성맞춤인 반가운 공간이 나타난다. 바로 ‘미군부대 마을역사 전시관’과 ‘마을카페’다. 원래 마을회관이었던 건물을 예쁘게 리모델링한 전시관과 카페는 봉일천4리 이웃들로 구성된 주민공동체인 ‘봉사리송암마을 특공대’가 운영하고 있다. 

전시관에서는 100년 전통을 이어온 산치성 마을제사, 일제강점기에 일군 송암농장, 한국전쟁 후 미군부대마을로 이어져 온 마을의 역사를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다. 벽에 걸린 옛 사진속에 담긴, 힘겨웠지만 삶의 의지가 넘쳤던 지난 시절의 이야기들이 방문자에게 아련한 감동을 전한다. 

봉일천4리 마을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미군부대 마을역사 전시관'.
봉일천4리 마을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미군부대 마을역사 전시관'.

전시장 바로 옆에 최근 문을 연 카페에서는 향긋한 커피, 또는 따끈한 쌍화차를 즐길 수 있다. 김은영 송암마을특공대 총무는 “몇 해 전부터 이웃들이 의기투합해 우리 마을의 역사를 알리고, 화합과 소통으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보자고 일을 벌였다”고 설명한다. 회원들의 열정과 파주시 주민제안공모, 희망마을만들기사업이 만나 소박하지만 뿌듯한 공간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 미군부대 마을을 콘셉트로 전시관을 만들자고 했을 때, 일부 어르신들의 반대도 있었어요. 그게 뭐 자랑할 만한 역사가 되겠냐는 우려였죠. 하지만 경기북부 여러 마을들이 기지촌 역사를 거쳐온 것은 엄연한 사실이잖아요.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사실대로 기억하는 게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김은영 총무의 말은 내년 취재 계획을 구상하는 기자에게 신선한 자극이 됐다. 올해 초 의욕적으로 시작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진득하게 이어가지 못했던 ‘골목길 탐방’ 시리즈를 2025년에는 좀 더 꼼꼼한 기획을 통해 새로운 버전으로 선보이고 싶다는 의욕을 다듬는다. 머잖아 사라져버릴 하찮은 풍경들을 사실 그대로 기억하기 위해 부지런히 사진과 글로 기록하는 일은 지역신문 기자가 할 수 있는 가장 보람된 일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마을공동체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회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봉사리송암마을 특공대 김은영 총무(왼쪽).
마을공동체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회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봉사리송암마을 특공대 김은영 총무(왼쪽).
'88마트'의 영문 표기는 특이하게도 필리핀 제2공용어인 타갈로그어로 쓰였다. 
'88마트'의 영문 표기는 특이하게도 필리핀 제2공용어인 타갈로그어로 쓰였다. 
군부대가 떠나간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마을버스 정류장 이름은 여전히 '사단앞'이다. 
군부대가 떠나간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마을버스 정류장 이름은 여전히 '사단앞'이다. 
독특한 조형미를 보여주는 한 건물의 시멘트 계단. 
독특한 조형미를 보여주는 한 건물의 시멘트 계단. 
'미군부대 마을역사 전시관'에서는 주민들이 제공한 흥미로운 사진들을 구경할 수 있다. 
'미군부대 마을역사 전시관'에서는 주민들이 제공한 흥미로운 사진들을 구경할 수 있다. 
골목길과 동일한 색으로 칠해진 봉일천4리 다리. 
골목길과 동일한 색으로 칠해진 봉일천4리 다리. 
다리 건너 진입로 초입에 자리하고 있는 전시관과 마을카페. 
다리 건너 진입로 초입에 자리하고 있는 전시관과 마을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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