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영웅은 열매를 팔지 않아』

이가순·이원재 부자(父子) 생애 다룬 첫 평전 
배고픈 농민 위해 곡괭이 든 독립지사 아버지
의사로 일하며 일군 재산 모두 털어넣은 아들 
다양한 사료, 세밀한 시선으로 흥미롭게 정리
  

[고양신문] 고양 땅 한강변을 따라 이어진 토당, 신평, 백석, 장항, 대화, 송포마을은 해마다 풍요로운 결실을 선사해주는 들녘이 이어진다. 100여년 전만 해도 메마른 천수답에 가까웠던 이 땅들을 농수로가 실핏줄처럼 이어진 옥토로 바꿔낸 장본인은 고양을 대표하는 독립지사 양곡 이가순 선생과 그의 맏아들 이원재 의사(醫師) 부자(父子)다. 일제강점기를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치열하게 살아낸 두 사람의 삶과 업적을 정리한 평전 『영웅은 열매를 팔지 않아』(신기식 저, 누림과 이룸 刊)가 출간됐다. 

양곡 이가순 선생은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가 뒤늦게 조명돼 1990년에야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고양에서는 2009년 고양시씨족협의회가 이가순 선생을 ‘자랑스러운 고양인’으로 선정하며 비로소 숭모사업의 물꼬가 트였다. 이후 이가순기념사업회가 창립돼 일산호수공원에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생애를 총괄적으로 기술한 저술이 없어 아쉬움이 컸었는데, 이번에 발간된 평전이 마른 땅의 물길처럼 갈증을 해소해 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부친의 숨은 조력자 정도로만 여겨졌던 이원재 의사의 역할과 헌신을 대등한 비중으로 조명했다는 점은 이 책의 탁월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시대가 요구하는 독립운동 모색

책은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가는 19세기 후반에서 시작해 일제의 국권 침탈과 강점, 뜨겁게 타올랐던 3·1운동의 불길, 국내와 해외를 넘나들며 전개된 독립운동, 농촌계몽운동의 한계와 고민, 일제의 수탈로 피폐해진 식민지 농민들의 참상, 그리고 해방 이후의 토지개혁, 그리고 전쟁 이후의 산미증산과 농촌경제의 성장까지 근현대사의 큰 흐름과 주요 사건들을 마디마디 정리해가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고양을 대표하는 애국지사 양곡 이가순 선생. [사진제공=신기식]
고양을 대표하는 애국지사 양곡 이가순 선생. [사진제공=신기식]

이러한 역사의 물결 속에서 황해도 해주 출신의 이가순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만주~원산으로 거처를 옮기며 독립운동(원산 3·1운동 주도)과 노동운동(부두노동자 총파업 지원), 조직운동(원산 신간회 창립) 등을 펼친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와 떨어져 독학으로 세브란스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이원재 역시 해주~서울~원산~하얼빈~강릉~서울로 이주하며 가는 곳마다 병원을 개원해 아버지 이가순, 그리고 장인 노백린 장군(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의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한다. 

고양의 농민들, 수리조합 덕분에 자작농 정착 

이가순, 이원재 부자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지점은 1930년대 중반 고양군 능곡 삼성당마을로 이주한 이후의 삶이다. 이가순 선생은 한강물을 퍼올려 천수답을 적시는 관개시설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고양 땅의 가난한 농민들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고, 이원재 의사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수백억원에 이르는 사재를 털어 양수장을 건립하고 농수로를 만드는 일에 착수한다. 

이원재 의사의 세브란스 의대 졸업사진. [사진제공=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은의학박물관]
이원재 의사의 세브란스 의대 졸업사진. [사진제공=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은의학박물관]

책은 이가순·이원재 부자가 완성한 행주양수장 관개시설과 고양수리조합이 일제가 식민지 농촌경제를 수탈할 목적으로 조직한 타 지역의 수리조합과는 전혀 다른 결실을 농민들에게 안겨주었다는 점을 다양한 사료와 진술을 근거로 자세히 설명해준다. 아울러 그 덕분에 해방 이후 초대 농림부장관 조봉암의 주도로 실시된 토지개혁 과정에서 고양의 많은 농민들이 비로소 자작농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서술한다.  

이처럼 책은 우리 민족이 겪어낸 역사의 맥락, 그리고 이가순·이원재 부자의 구체적인 삶을 교차적으로 병치해 거시성과 현장성을 동시에 획득한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극존칭 헌사

저자 신기식 목사는 이가순 선생에 대해 “다른 애국지사들의 삶을 살펴봐도 이가순 선생처럼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새로운 목표를 끊임없이 찾아내며 구체적인 성과를 이끌어낸 이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어 이원재 의사에 대해서도 “의사로서의 삶, 가문의 경제를 일으킨 가장으로서의 삶, 자녀들을 모두 훌륭히 가르친 부모로서의 삶을 성공적으로 병행했고, 나중에는 이 모든 성과들을 지역과 민족을 위하는 일에 아낌없이 사용한 모습은 너무도 위대하다”고 평했다.

『영웅은 열매를 팔지 않아』라는 제목은 어떤 의도로 지은걸까. 저자는 매년 4월 7일 행주양수장 이가순관개송덕비 앞에서 열리는 고유제 제문에서 이가순 선생에게 ‘존영(尊靈)이시여!’라는 극존칭을 헌사하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평전을 쓰기 위해 만난 지역의 원로들은 하나같이 이가순·이원재 부자에게 엄청난 존경과 칭송을 바쳤어요. 한마디로 두 명의 위인 덕분에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됐다는 거죠. 존귀한 신령의 지위로 숭앙하는 마음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자신들이 이룬 열매를 하나도 사적으로 취하지 않았어요. 교회를 세우고, 불에 탄 학교를 재건하고, 양수장을 만들고 수리조합을 탄생시키면서도 자녀들에게는 재산을 물려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럼에도 후손들은 하나같이 훌륭한 교육을 받고 각계의 인재로 성장했습니다. 영웅이라는 호칭이 부족한 삶을 살았지만 열매를 팔지 않은, 위대한 지도자의 모습을 이들에게서 보았습니다.” 

덕양산 아랫자락 행주양수장 앞에 자리한 '이가순 관개송덕비'. 
덕양산 아랫자락 행주양수장 앞에 자리한 '이가순 관개송덕비'. 

목회와 시민사회활동 이어온 저자 

책을 쓴 신기식 목사는 신생교회(고양시 덕양구 덕은동)를 35년째 담임하고 있다. 젊은 시절 고양의 다양한 시민사회활동을 이끌었고, 현재도 고양YMCA부이사장, 고양자치발전시민연합 상임대표 등 폭넓은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신 목사는 이번 평전을 집필함으로써 양곡이가순기념사업회(초대 회장 허준, 2대 회장 유재덕) 사무국장이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역할에 톡톡히 이름값을 하게 됐다.

목사 신분으로 이처럼 완성도 높은 평전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저자의 남다른 필력과 내공 덕분이다. 수년전부터 글쓰기에 집중해온 신기식 목사는 이미 종교·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소설 『황금저울』, 『다말의 짜악』을 비롯해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한 바 있다. 

이가순 이원재 평전 『영웅은 열매를 팔지 않아』를 집필한 신기식 목사. 
이가순 이원재 평전 『영웅은 열매를 팔지 않아』를 집필한 신기식 목사. 

“평생 목사라는 신분으로 살아오며 ‘종교’라는 이름 안에 숨어 벌어지는 부패와 탐욕의 모습들을 목도했습니다. 그러한 경험들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책임감이 나를 글쓰기로 몰아간 것 같습니다.”

저자의 이런 배경 덕분에 이 책에서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개신교가 담당했던 역할과 과오, 그리고 이가순과 이원재의 가계에 기독교 신앙의 영향력이 면면히 이어지는 모습이 또 하나의 테마로 비중 있게 다뤄진다. 특히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명이었고, 조선 감리교단의 대표적 지도자였던 정춘수 목사의 변절과 친일행적을 적나라하게 서술하는 대목에선 저자가 속한 교단의 어두운 역사를 성찰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이원재 선생이 토지를 희사해 건립된 토당동 삼성당마을 능곡감리교회.  사진 오른쪽에 행주양수장에서부터 흘러온 수로가 보인다. [사진제공=신기식]
이원재 선생이 토지를 희사해 건립된 토당동 삼성당마을 능곡감리교회.  사진 오른쪽에 행주양수장에서부터 흘러온 수로가 보인다. [사진제공=신기식]

“숭모사업 새로운 활력소 기대”

책은 지인들의 후원을 받아 초판을 찍었는데, 출간하자마자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일산농협(조합장 김진의)에서 평전을 대량 구매하기로 한 것. 고양 땅 농업의 정초를 놓은 두 위인의 삶을 오늘을 살아가는 농업인들이 펼쳐 읽는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다. 덕분에 책도 재판을 찍을 수 있게 됐다니 일석이조다. 

신기식 목사는 “평전의 출간이 그동안 띄엄띄엄 진행됐던 이가순·이원재 부자의 숭모사업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으면 좋겠다. 보훈처에서는 공적을 다시 검토하고, 감리교단에서는 참다운 신앙인의 표상으로 우러르고, 무엇보다도 두 분이 만년의 모든 것을 바친 고양에서 이들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사업들이 다채롭게 전개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애국지사 이가순 선생의 묘. [사진제공=신기식]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애국지사 이가순 선생의 묘. [사진제공=신기식]
이원재 의사 6남매 강릉 관동병원 정원에서(1930년), 오른쪽부터 이원재(막내 인순), 아내 노숙경(인옥), 인숙(이가순 큰딸), 승훈, 동훈, 인영, 인철(큰딸), 맨 왼쪽 남자는 노태준(노백린 장군의 막내아들)으로 보인다. [사진제공=신기식]
이원재 의사 6남매 강릉 관동병원 정원에서(1930년), 오른쪽부터 이원재(막내 인순), 아내 노숙경(인옥), 인숙(이가순 큰딸), 승훈, 동훈, 인영, 인철(큰딸), 맨 왼쪽 남자는 노태준(노백린 장군의 막내아들)으로 보인다. [사진제공=신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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