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하류인문학

김경윤 인문학자
김경윤 인문학자

[고양신문] 오랜 만에 친한 출판사 사장과 동네 동생을 만나 참치횟집에서 술 한 잔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갑자기 출판사 사장이 나이가 먹으니까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생각나는 대로 막 이야기를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며 자신의 상태를 토로했습니다. 원래 술자리는 동조현상이 자주 일어나는 곳이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맞장구를 치며 자신도 그렇다고 고백합니다. 보통 술자리는 불만을 토로하고 성토하며 성토대상을 씹는 맛으로 깊어지기 마련이건만, 그날따라 성토장이 아니라 고백의 현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고백의 수위도 점점 높아져, 이제 남에게는 고백의 내용을 발설할 수 없는 고해성사 수준까지 올라갔는데요. 그 아찔하고 아슬아슬한 언어의 줄타기로 서로 휘청대고 있을 때쯤, 출판사 사장이 느닷없이,

“그런데 말이죠. 우리 딸이 저를 나무랍디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어른은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안 된다고요.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더 어렵고 힘들어진다네요. 딸내미에게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라구요.”
“그래요?”
“네, 그래서 내가 딸한테 너도 힘드냐? 물었지요.”
“그랬더니요.”
“딸내미 왈, ‘내가 아무리 대가리 꽃밭이라도 힘든 일이 없겠어.’ 랍니다.”
“대가리 뭐요?”
“꽃밭이요.”
“내가 아는 속어 중에 ‘미친X 꽃다발’은 들어봤지만, ‘대가리 꽃밭’은 처음인데요.”

심각함은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화제가 ‘대가리 꽃밭’에 꽂히면서 서로 킬킬 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호기심 천국인 나는 스마트폰을 열어 ‘대가리 꽃밭’을 검색했습니다. 그랬더니, 엄청난 데이터가 눈앞에 좌르르 꽃밭처럼 펼쳐졌습니다. 머리에 꽃들로 가득 차서 항상 낙천적인 사람이라는 설명도 있고, MBTI 유형 중에는 재기발랄한 활동가 엔프피(ENFP)가 전형적인 ‘대가리 꽃밭’ 유형이라는 설명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연인은 이효리가 소개되더군요.

호기심의 흐름에 따라 내 MBTI 유형을 찾아봤더니 나는 가장 이상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인프피(INFP)입니다. 작가로는 세익스피어가, 연예인으로는 아이유를 꼽습니다. 단순하고 행복한 삶을 원하고, 이타적이며, 자신만의 가치관을 신뢰하는 장점이 있는가 하면 객관적인 판단 능력이 부족하고 작은 비난에도 실망을 하고 상처를 받는 유형이랍니다. 그런데요, 엔프피나 인프피나 외향(E)과 내향(I)이 다를 뿐 ‘대가리 꽃밭’인 것은 같습니다. 어느새 ‘대가리 꽃밭’이라는 이 저속+낭만적 합성어가 내 마음 속에 활짝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요즘 시절이 하 수상하고, 되는 일도 없어 자주 우울했는데, 술자리에서 들은 말 하나로 분위기가 상큼하고 명랑해졌습니다. 황지우 시인의 시로 패러디하면, “대한 사람 대한으로 / 길이 보전하세로 / 각자 자기 자리에” 주저앉을 때 우리는 “낄낄대면서 / 깔쭉대면서” 머리 속에 꽃밭을 한아름 가꾸면서 이 모진 세월을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올해 텃밭에 작물만 심고 꽃은 심지 않았네요. 돌아오는 주말에는 꽃씨를 잔뜩 들고 텃밭으로 가야겠습니다. 언젠가 머리 속에서 피어난 꽃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척박한 현실에서도 피어나리라 굳게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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