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혜의 발랑까진

양지혜 청소년 폐미니스트 네트워크 활동가
양지혜 청소년 폐미니스트 네트워크 활동가

[고양신문] 종종 피켓을 들 일이 생긴다. 알리고 싶은 진실이 있어서, 함께하자고 권하고 싶은 활동이 있어서 그렇다. 지하철역에서, 사람이 많은 대로변에서 피켓을 들고 자주 서 있었다. 두렵거나 긴장되는 마음이 든 적은 별로 없다. 나의 의견이 시민으로서 존중받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욕하고 지나가는 시민들이 나의 일상을 침범하거나 무너뜨리지 못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교문 앞에서 피켓을 들었을 때는 떨리고 위축되었다. 눈빛 하나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고, 무관심하게 스쳐가는 동료들 사이에서 몸을 웅크린 채 교실로 돌아가곤 했다. 일상 대부분을 보내는 공간에서 목소리를 내는 일이 이렇게나 어렵다는 사실이 서러웠다. “공부에 충실하라”는 선생님의 조언부터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는 냉소적인 반응,  “대단하지만 나는 같이 못할 것 같아”라는 친구들의 힘 빠진 응원까지 하나 같이 마음에 박혔다.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에서 진행한 '다하는 다락방' 소모임 모습. [사진제공=양지혜]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에서 진행한 '다하는 다락방' 소모임 모습. [사진제공=양지혜]

학교에서 활동가로, 그리고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지난한 일이었다. 개학을 앞두고 위티에서 진행한 소모임 <다하는 다락방>에서는 학교에서 살아남고 있는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의 경험이 모이는 자리였다. 우리는 학교에서 목소리를 내본 경험과 뿌듯함, 어려움을 고루 나눴다.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은 분명히 학교의 변화를 만들고 있었다. 학교 내에서 퀴어문화축제를 함께 만들어봤고, 차별발언에 문제제기를 해줄 동료를 만나기도 했다.

동시에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은 변화를 말하는 이들이 ‘소수’라는 점에서 큰 고립감과 어려움을 느꼈다. 많은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에게 ‘소수이기에 더욱 논리적이게 잘 말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어떤 이는 페미니스트 전체를 대표해 말하고 있다는 중압감을 느끼기도 했고, 또 다른 이는 학내 구성원과 터놓고 고민을 나누고 싶은 순간에도 분명한 입장을 내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학교에서의 활동가들은 스스로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 경험이 없는, 언제나 스스로를 정당화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 활동을 멈추지 않은 이유는 명확하고 따뜻했다. 어떤 이는 나와 연결된 세상의 아픔을 직면하고 싶어했고, 어떤 이는 활동으로 나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즐겁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옳은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했고, 어떤 이는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청소년 페미니스트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의 변화를 만드는 일이기도 했지만, 스스로의 존재를 지키는 일이기도 했다.

올해는 스쿨미투를 계기로 창립된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가 어느덧 6년차를 맞는 해다. 피해자의 위치를 넘어, 세상의 변화를 만드는 ‘활동가’가 되기로 선택한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의 결정에 깊은 존경을 보낸다. 앞으로도 위티는 존재를 지키며 나아가는 청소년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의 든든한 동료가 되고자 한다.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에서 진행한 '다하는 다락방' 소모임 모습. [사진제공=양지혜]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에서 진행한 '다하는 다락방' 소모임 모습. [사진제공=양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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