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비슷한 거 하는 M세대의 글쓰기>

해남 두륜산. 김수지 제공
해남 두륜산. 김수지 제공

[고양신문] 해남에서 올라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습니다. 지난 가을 귀촌 센터에서 두 달을 보내고 올라왔을 땐 도시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이 비극으로 여겨질 만큼 슬펐는데, 이번엔 이상하게 슬프지 않았습니다. 비극은커녕 일산에서 누리는 모든 것들이 너무도 쾌적해 날아갈 것만 같습니다. 모니터는 시원하고 오래된 의자와 책상은 정확히 제 체형에 맞춰져 있으며 도서관은 십 분 거리고 카페는 지천입니다. 이토록 편리한 세상이라니! 그런데 저는 시골살이의 불편함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일부러 쑥을 캐서 찹쌀을 갈아 떡을 찌고 한 시간 거리는 당연하다는 듯 걸어 다닙니다. 분명 편리함 말고 다른 이유가 있을 겁니다. 

사실 해남에 있는 동안 글을 많이 못 썼습니다. 첫 주는 중고차 매매상과 씨름하느라 흘려보냈고(으, 중고차!) 둘째 주는 개한테 물려 병원을 오가는 사이 다 가버렸습니다(아, 진돗개!). 그 후론 ‘길 위의 인문학’ 공모가 시작돼 강의 기획안을 구성하고, ‘첫 문장’ 레터를 쓰고, 바다를 걷고 산을 오르느라 겨우 한 편의 칼럼과 수필, 그리고 앞으로 들춰볼 일 없는 SF소설을 한 편 구상했을 뿐입니다.

대신 원없이 산을 탔습니다. 달마산과 두륜산은 동네 뒷산 가듯 다녔고, 영암의 월출산부터 장흥의 천관산, 순천의 조계산과 지리산 천왕봉까지, 글을 쓰러 간 건지 산을 타러 간 건지 헷갈릴 정도로 남도의 명산을 부지런히 올랐습니다. 문학관 관장님껜 소설 취재차 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괜히 눈치가 보여 한 말이긴 하지만 거짓말은 아닙니다. 쓰는 사람들은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것을 어떻게 글에 써먹을까만 생각하기 때문에 산을 많이 타면 산을 많이 타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쓰게 됩니다. 저도 지금 능선을 따라 거대한 위협으로부터 도망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구상 중입니다. 여자의 곁엔 한때 자신을 물었던 진돗개가 껌딱지처럼 붙어 다닙니다.

월출산 출렁다리. 김수지 제공
월출산 출렁다리. 김수지 제공

그렇게 책상 앞에 앉아 이야기의 얼개를 구성하던 중 불현듯 도시로의 귀환이 슬프지 않은 이유가 깨달아졌습니다. 소음이 사라진 겁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윗집 아이들이 전에 없이 얌전합니다. 아예 안 뛰는 건 아닌데, 전처럼 두 녀석이 광기에 휩싸여 자정까지 치고받고 악을 쓰며 뛰어다니지는 않습니다. 그저 소심한 외동이 생활하는 정도의 소음입니다.

온갖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이 부부가 갈라선 것일까? 그래서 각자 한 명씩 맡기로 하고 헤어진 것일까? 좋은 이유는 하나도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잠시, 집에서 이런 고요를 누릴 수 있다는 게 너무도 기적 같고 황홀하여 오랜만에 집중해서 책을 읽고 묵혀둔 원고를 퇴고했습니다.

글쓰기를 마친 후엔 자전거를 타고 대화천을 향해 도로를 내달렸습니다. 5월의 천변은 놀랍도록 푸르렀고 모든 것이 조금 더 번영해 있었습니다. 그제야 제가 원하는 것은 귀촌이 아니라 고요하게 쓸 수 있는 공간임을 깨닫습니다. 층간 소음이 사라진 일산은 마치 피안(彼岸)과도 같습니다. 천국을 찾았으니 이제 시골 열병도 끝입니다. 

설악산 대청봉. 김수지 제공
설악산 대청봉. 김수지 제공

물론 남도의 산이 그립지만 여기서는 설악산이 가깝습니다. 고양종합터미널에 가면 설악산으로 향하는 버스가 매일 세 대나 있습니다. 능선을 따라 도망 다니는 여자가 제일 먼저 파고든 산도 설악입니다. 오대산, 태백산을 넘어 지리산에 다다르는 거대한 여정이 바로 설악산에서 시작된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 최초의 여정을 취재하기 위해 내일 설악산 공룡능선을 종주할 예정입니다.

여자는 아마 봉정암에서 미역국을 한 그릇 먹고 공룡의 등을 넘어 속초에 가닿았을 겁니다. 열 시간이 넘는 산행으로 허기가 질 테니 속초중앙시장에서 닭강정을 사 들고 바다로 달려가 따뜻하고 달콤한 닭의 육질을 느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했을 겁니다. 저도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 종주를 마치자마자 속초로 달려가 바다를 보며 닭강정을 먹을 예정입니다. 다 소설 취재차 하는 일입니다. 저는 작가가 된 후로 한 번도 놀아본 적이 없습니다. 

월출산 천황봉. 김수지 제공
월출산 천황봉. 김수지 제공
찬관산 아육왕탑과 다도해 풍경. 김수지 제공
찬관산 아육왕탑과 다도해 풍경. 김수지 제공
장흥 천관산. 김수지 제공
장흥 천관산. 김수지 제공
순천 조계산. 김수지 제공
순천 조계산. 김수지 제공
지리산 천왕봉에서 맞이하는 일출. 김수지 제공
지리산 천왕봉에서 맞이하는 일출. 김수지 제공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