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고양 1989~1990⑤ 연이은 택지개발과 시승격 논란
화정·성사·능곡·행신·중산·탄현도 줄줄이 ‘개발’
분할 반대 여론, 최초 도농통합 시승격 초석
생산시설 없이 집만? 자족도시 막는 모순 자각
[고양신문] 지난해 말 편성한 2024년 고양시 예산안은 약 3조1660억원이다. 그렇다면 35년 전인 1989년 고양시 살림에 쓰인 돈은 얼마였을까. 답은 519억원. 인구가 5배 증가하고, 35년 동안의 물가상승을 고려하더라도 오늘날의 6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예산 규모가 참 소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듬해인 1990년 고양군 재정규모는 1500억원이 책정된다. 일 년 만에 무려 3배나 폭증한 이유가 뭘까. 고양군 6개 지구(화정·성사·능곡·행신·중산·탄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되는 공공택지개발 사업을 위해 약 1000억원의 특별회계를 세웠기 때문이다.
일산 발표 한 달 만에 “화정도 개발”
서울을 둘러싼 경기도의 빈 땅에 대규모 택지개발을 통해 ‘신도시’를 건설하겠다는 89년 ‘4·27 발표’는 시작에 불과했다. 일산·분당·평촌 등 신도시 5개만으로는 노태우 정부가 계획한 ‘주택 200만호 건설’이라는 목표에 한참이나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각 시·군과 주택공사와 토지공사를 다그쳐 수도권 곳곳에서 소규모 개발을 동시다발적으로 전개하는 전략을 세웠고, 그 전략에 가장 적합한 대상이 바로 서울과 인접하면서도 그린벨트가 널려 있는 고양군이었다.
일산신도시 계획이 공개된 지 한 달 보름도 지나지 않은 6월 10일, 건설부는 또다시 지도읍 화정리 일대 62만 평을 택지개발 예정지구로 고시했다. 해당 부지를 전면 수용해 공영개발을 추진하고, 개발이익금으로 도로와 상하수도 등 도시기반 시설을 갖추겠다는 것. 1만4500호 건설, 5만8000명을 수용하는 ‘화정신도시’ 계획이 윤곽을 드러낸 것이다.
고양군 6개 지구 연이어 택지개발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화정지구에 이어 성사지구, 능곡지구, 행신지구, 중산지구, 탄현지구 택지개발 계획이 차례차례 발표됐다. 첫 물꼬를 트는 게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막무가내였다. 6개 택지개발지구의 계획인구를 합치면 거의 일산신도시에 버금갔다. 1989년 한 해 동안 수용인원 60만 명 규모의 어마어마한 택지개발 계획이 고양군에 떠안겨진 것이다.
90년 4월 고양신문에 실린, 고양군수와 토지개발공사 서울지사장 공동명의로 발표된 ‘고양화정지구 택지개발사업안내’를 보면 “민족의 염원인 통일에 대비하고, 고양군이 명실상부 경기북부의 중심도시로 성장하기 위해” 추가 택지개발사업을 추진한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6개 택지개발계획의 졸속 추진은 긴 안목에서 볼 때 도시의 역사에 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일산신도시는 그나마 녹지나 문화시설 등의 공공인프라가 따라줬다. 하지만 나머지 6개 택지개발지구는 그마저도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말 그대로 인구 그 차제만을 위한 주거단지였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벗어던지지 못한 ‘베드타운 고양’이라는 불명예가 1990년대 초에 고착된 ‘1+6 택지개발’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후발주자 학습효과? 반발심리 잠잠
그런데 당시 고양신문을 훑어보며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6개 택지개발지구에서는 수용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일어났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산신도시 발표 직후 그토록 강렬하게 철회 요구가 들끓었던 두어 달 전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지 않은가.
이유를 추측해 볼 수는 있겠다. 우선 몇 달이라는 시차에서 형성된 후발주자의 학습효과 때문이 아닐까. 택지개발사업이 우리동네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들이 고양군 전체에 빠르게 퍼져나갔고, 정부와 지자체가 주도하는 택지개발사업에 주민 반대 따위는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걸 옆동네 일산의 상황이 생생히 보여줬던 것이다.
아울러 거대한 평야지대 대부분이 농경지였던 일산신도시 수용지역과 달리 성사지구는 원당, 행신지구는 능곡, 탄현과 중산지구는 일산이라는 읍소재지에 인접한 지역이라 도시개발에 대한 잠재적 기대감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게 아닐까. 어쨌든 당황과 체념과 기대가 복잡하게 뒤섞인 채 6개 지구 공공택지개발사업이 90년부터 순차적으로 착공한다.
원능시 분할승격 vs 고양군 전체승격
폭발적 인구 증가가 눈앞으로 다가오며 이제 고양군은 수년 내에 시로 승격하는 게 확실해졌다. 문제는 어떤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가 지역의 화두로 떠오른다. 신도시 개발계획이 발표되기 전, 수년간 유력하게 논의됐던 안은 도시화가 상대적으로 많이 진행된 원당과 능곡을 합쳐 ‘원능시’로 승격시키고, 나머지 지역을 고양군으로 남겨두는 도농분할 모델이었다. 일부에서는 ‘원당시’와 ‘능곡시’ 2개의 시를 따로 만들자는 방안도 주장됐다.
하지만 7개 지역 택지개발사업이 동시에 추진되며 도시화를 기준으로 한 지역구분이 무의미해지면서 기존의 고양군 전체를 그대로 시로 만드는 ‘도농통합형 시승격’ 모델이 강하게 부상했다. 통합형을 지지하는 이들은 시흥군이 의왕시 등으로 분리된 예를 거론하며 “행정구역을 분리하면 도시계획의 일관성을 꾀할 수 없고, 오래도록 지속해 온 공동생활권이 단절된다”고 우려를 표했다. 이와 함께 지역민의 애향심과 향토문화 보존과 같은 정서·문화적 가치를 위해서도 통합형이 답이라는 논리를 폈다. 한 주민은 “도시 규모가 커야 국가 차원의 지원이 많아질 것”이라는 실리적 이유를 들기도 했다.
반대로 분할형을 지지하는 이들은 “도시화된 지역과 농촌지역을 분리해야 각자의 특색을 살려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더 이상 고양 땅 쪼개면 안된다”
의견이 분분하자 90년 3월 고양신문이 나서서 여론 향배를 알아보기 위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70%대 30%로 통합형 시승격을 지지하는 숫자가 많았다. 비록 오늘날의 전문기관이 실시하는 정교한 방식의 여론조사는 아니었지만, 나름 신문사의 역량을 동원해 고양군 21개 지역 321명의 주민들에게 골고루 찬반의사를 질문해 얻어낸 유의미한 결과였다.
앞선 연재에서도 밝혔듯 도농분할이 당시의 일반적인 시승격 방식이었지만, 유독 고양에서만큼은 통합형 모델의 지지가 뜨거웠던 이유는 뭘까. 어쩌면 정부의 연이은 택지개발 발표로 인한 불안심리가 오히려 지역공동체적 구심력을 단단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고양을 쪼개서는 안 된다. 고양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라고 외치는, 고양신문에 실린 한 독자의 기고문이 이를 방증한다.
주민들의 여론이 이렇게 흐르자 백성운 군수도 건설부에 올라가 있는 ‘원능도시계획안’을 되물리고, 고양군 전체를 시로 승격하는 안을 적극 추진하기로 방향을 잡는다. 이처럼 주민여론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군 행정이 이에 힘을 보탠 덕분에 1992년 고양군은 대한민국 최초의 ‘도농통합시’로 승격할 수 있었다.
참고로, 한때 원당과 능곡을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인식하려던 경향은 오늘날에도 원능수질복원센터, 원릉역, 원능교회, 원능식당, 원능빌딩 등 주교동과 토당동 일대의 여러 이름 속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도시발전 가로막는 ‘수도권정비계획법’
도시개발과 시승격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자, 고양군 전역을 짓누르고 있는 규제의 불합리성에 대한 자각이 일기 시작했다. 90년 3월 고양신문에는 ‘고양군 이전촉진권역 문제 있어, 공장규제 풀어 생산기능 부여해야’라는 긴 제목의 기사가 게재된다. 내용을 살펴보면 고양군은 그린벨트와 군사보호구역 등 각종 규제로 피해가 크지만, 그중에서도 1984년 제정된 ‘수도권정비계획법’이 고양군 전역이 ‘이전촉진권역’으로 묶어버린 점이 고양군 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전촉진권역에서는 인구증가를 막기 위해 공장, 대학교, 업무용 건축물의 신설과 증설이 금지된다. 하지만 고양군에는 인구를 유발한다는 공장이나 기업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연간 6~7% 인구증가가 꾸준히 이어져 왔다. 법이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셈이다. 한술 더 떠 정부가 나서서 60만 명에 가까운 인구증가를 계획하고 있는 마당에 공장이나 기업은 ‘인구억제’를 이유로 규제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모순덩어리 그대로 여전히 요지부동
해당 기사는 “89년 한해동안 모텔과 여관이 37.5% 증가하고 유흥음식점이 18% 증가하는 등 고양군이 소비지향적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는 우려를 담았다. 이에 따라 “고양군이 완전한 자족도시로 발전할 수 있도록 각종 생산시설을 갖춘 공장 등을 유치해야 하고, 이를 위해 이전촉진권역 재조정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주민들의 문제의식을 반영해 “백성운 고양군수가 최근 경기도에 ‘수도권정비기본계획 변경의 필요성 및 대책’을 건의했으며, 이전촉진권역 일부 변경과 각종 규제 완화를 요구했다”고 적고 있다.
고양신문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방안은 △송포면 한강하구 인접 지역의 개발유도권역 변경 △일산신도시 지구 내 일부 지역의 공업지역 지정 등이었다.
하지만 자족도시를 기대하는 상식적인 요구가 이토록 오랫동안 외면받으리라고는 34년 전 주민들도 차마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수도권정비계획법은 34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요지부동 모순덩어리의 모습 그대로 남아 고양시의 숨통을 짓누르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고양군 정치 ‘1노 3김’ 구도 축소판
1990년을 되돌아보며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 바로 당시 커다란 정치적 지형변화를 몰고 온 ‘3당 합당’ 선언이었다. 배경 설명을 좀 하자면, 90년대를 열던 시절 고양군의 정치세력은 ‘1노 3김’으로 요약되는 87년 대선 4자 대결구도의 축소판이었다. 고양군의 현역 이택석 국회의원은 신민주공화당(김종필) 소속이었고, 전국구 이교성 국회의원은 평화민주당(김대중) 고양군 지구당위원장이었다. 여기에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노태우)에서는 검사 출신 이국헌 위원장이, 제1야당인 통일민주당(김영삼)에서는 기업인 출신 이근진이 차기 총선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새해 벽두부터 경쟁적으로 세력 과시 행사를 열었다. 문예회관에서 열린 민정당 고양군지구당 창당9주년 기념식에서 이국헌 위원장은 “3만5000명의 당원을 확보했다”고 보고하며 “하나로 굳게 뭉쳐 다가오는 지방자치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자”고 독려했다.
현역 이택석 의원 역시 신도농협에서 열린 ‘89 의정보고 및 신민주공화당 고양군 단합대회’에서 “지축역 개통 추진, 병목지역 도로 개설” 등의 의정성과를 보고하며 지지자들을 결집시켰다.
순수친목 명분으로 조직 유지 시도
하지만 1월 22일 노태우 대통령이 김영삼 총재, 김종필 총재와 함께 손을 잡고 합당을 선언하는 파격적인 장면이 TV화면을 통해 보도됐다. 그리고는 불과 한 달 만에 헌정사상 초유의 여야 통합 거대정당인 민주자유당이 깃발을 올렸다. 이제 지역정치권도 재편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3월과 4월 초 고양신문 지면에 실린 정치권 단신기사들을 보면, 3당 합당 선언으로 혼란에 빠진 지역정치권의 복잡한 상황들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우선 민정당 고양군지구당의 주요당직자들이 중심이 되어 순수친목단체를 표방하며(물론 이는 누가 봐도 3당 합당 반발이라는 시선을 피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하다) ‘민정동우회’를 발족시켰다는 기사가 나온다. 지구당위원장 자리를 내놓게 된 이국헌이 고양군 민정동우회와 북방개발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조직 유지를 시도했던 것이다.
곧이어 출범한 ‘덕양민우회(회장 신인철)’ 역시 “정파를 초월한 지역발전 기여와 회원 상호 간 친목도모”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현판식에는 정치 재기를 노리는 최영덕 전 국회의원이 참석해 격려사를 했다.
새로운 정치지형… 제각각 암중모색
하지만 3당 합당의 최대 수혜자는 아무래도 현역인 이택석 의원이었다. 두어 달 넘는 복잡한 조정과정을 거쳐 마침내 4월, 전·현직 국회의원과 당직자·당원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자당 고양군지구당 통합개편대회’가 열렸고, 수순대로 이택석 의원이 지구당위원장으로 선출됐다. 고양신문은 이 의원이 “3당 합당은 대한민국 헌정사의 오욕을 씻고 생산적 정치를 하기 위한 결단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고 보도했다.
이날 행사에서 가장 관심을 받은 이들은 당연히 이국헌, 이근진이었다. 신문은 이들이 “통합개편대회 지지를 표명하며 단합을 강조했다”고 적고 있지만, 속내가 어땠을지는 짐작이 간다. 하지만 이국헌은 집권 여당의 뿌리인 민정당의 적자라는 점에서, 이근진은 신생 민자당의 미래권력이 김영삼이라는 점에서 각각 희망의 근거를 남겨두고 있었다.
유일한 야당정치인으로 남게 된 이교성 의원도 3당 합당이 달갑잖기는 마찬가지였다. 전통적으로 보수세가 강한 지역 특성을 고려할 때, 복수의 보수정당이 표를 나눠 갖는 국면이 본인에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변화된 상황에 맞춰 전략을 새롭게 짜야 했다.
이처럼 1990년 전반기에는 연이은 택지개발 발표, 시승격 논의, 사상 초유의 정치지형 개편이 맞물려 한편으로는 혼란스럽고, 한편으로는 역동적인 시간들이 내내 이어졌다.
※ 참고자료 : 고양신문 1호(89.06.01)~31호(90.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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