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렘브란트·피카소를 따라간
3일간의 도쿄·하코네 미술관기행
은퇴후 문화예술소비 주축 급부상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가속화되면서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갖춘 이른바 '실버 세대'가 새로운 문화 예술 소비의 주축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도쿄 아티존 미술관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가속화되면서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갖춘 이른바 '실버 세대'가 새로운 문화 예술 소비의 주축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도쿄 아티존 미술관

[고양신문] “서도호전 보셨어요? 10분 만에 매진돼 암표가 돈다고 하네요.” “모네 100주년이라는데 도쿄 안 가세요?” “아이쿠, 쿠사마 야요이 회고전이 9월 11일부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려서 일본의 작품들이 이미 옮겨갔다고 하네요.”

무슨 별나라 사람들의 이야기일까. 언제부터 우리가 이렇게 미술, 전시, 그것도 마네, 모네, 렘브란트 등 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유명 전시에 이렇게 열광하고, 박식해졌을까. 최근 몇 년 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더현대 등 국내 전시가 ‘핫’한 나들이 장소가 됐고 다양한 미술 강좌와 도슨트 강의가 인기를 끌고 있다. 루브르, 오르세, 메트로폴리탄 등 유명 미술관 투어도 참가자를 수월하게 모으고 있다. 무슨 일일까.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가속화하면서 경제적·시간적 여유를 갖춘 이른바 ‘실버 세대’가 새로운 문화예술 소비의 주축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치열했던 생업의 현장에서 한 걸음 물러난 이들은 단순히 육체적 휴식을 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질을 높이고 내면을 성찰하기 위해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9월 11일부터 13일까지 ‘번개 여행’으로 다녀온 도쿄·하코네 미술관 투어는 최근의 이러한 흐름을 어느 정도 보여주는 일정이었다.

우에노 공원 안에는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해 201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국립서양미술관과 1926년 문을 연 일본 최초의 공립미술관 도쿄도 미술관이 나란히 위치해 있다.
우에노 공원 안에는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해 201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국립서양미술관과 1926년 문을 연 일본 최초의 공립미술관 도쿄도 미술관이 나란히 위치해 있다.

여행 첫날은 도쿄 문화 예술의 심장부라 불리는 '우에노 공원'에서 시작됐다. 자연과 예술이 숨 쉬는 우에노 공원 안에는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해 201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국립서양미술관과 1926년 문을 연 일본 최초의 공립미술관 도쿄도 미술관이 나란히 위치해 있다. 숲이 우거진 공원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최고 수준의 미술관들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 구조다. 잘 정비된 유기적 동선과 차분한 주변 환경은 체력적 부담을 줄이고 작품 감상의 몰입도를 높여주어, 문화 예술을 즐기려는 실버 세대 관람객들에게 최적의 인프라를 제공한다.

특히 우에노 공원의 국립서양미술관에서는 올해 서양 미술사의 중요한 이벤트를 기념하는 대규모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반환받은 마쓰카타 컬렉션을 기반으로 한 이 미술관에서는 현재 <클로드 모네-사후 100주년> 전시가 진행 중이다. 전시의 백미는 단연 모네의 1916년작 '수련, 버드나무의 반영'이다. 가로 2미터 크기의 이 대작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시골에 피난을 갔다가 파손됐고, 전후 행방이 묘연했다가 2016년 루브르 미술관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돼 2017년 기증된 극적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와 함께 <판화가 렘브란트-도전, 계승, 임팩트> 특별전도 열리고 있어, 부드러운 번짐 효과(버)를 구현한 1655년 드라이포인트 명작 '민중에게 헌정된 그리스도' 등 빛과 어둠을 직조한 렘브란트의 실험적 판화 세계를 심도 있게 조명한다.

국립신미술관에서는 9월 21일까지 파리 국립 피카소 미술관과 협력한 대형 전시 ‘Picasso, through the Eyes of Paul Smith(폴 스미스의 시선으로 본 피카소)’가 열리고 있다
국립신미술관에서는 9월 21일까지 파리 국립 피카소 미술관과 협력한 대형 전시 ‘Picasso, through the Eyes of Paul Smith(폴 스미스의 시선으로 본 피카소)’가 열리고 있다

“아, 이런 그림이 있었지.” 국립서양미술관에서는 눈이 시리도록 많은 인상파 유명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마쓰카타 컬렉션’ 덕분이다. 메이지 시대 총리대신을 지낸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아들이자 가와사키 조선소 사장인 마쓰카타 고지로가 20세기 초 유럽에서 수집한 방대한 서양 미술품 소장품들이 오늘의 국립서양미술관 설립의 기초였다. 그 과정 자체가 세계사의 한 장이기도 하다. 마쓰카타가 수집한 작품들은 세계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프랑스 등으로 대거 흩어지고, 압수되고, 소실됐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체결 직후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프랑스 외무장관에게 마쓰카타 컬렉션의 반환을 요청했고, 프랑스 정부는 전시할 장소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렇게 설립된 곳이 바로 국립서양미술관이다.  

국립서양미술관 모네의 1916년작 '수련, 버드나무의 반영'. 가로 2미터 크기의 이 대작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시골에 피난을 갔다가 파손됐고, 전후 행방이 묘연했다가 2016년 루브르 미술관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돼 2017년 기증된 극적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국립서양미술관 모네의 1916년작 '수련, 버드나무의 반영'. 가로 2미터 크기의 이 대작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시골에 피난을 갔다가 파손됐고, 전후 행방이 묘연했다가 2016년 루브르 미술관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돼 2017년 기증된 극적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우에노역에서 3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오모테산도역에 네즈미술관이 있다. 우리의 청담동인 듯 명품, 유명 브랜드, 빌딩숲 속에 갑자기 다른 속도, 다른 공기가 관람객을 당황하게 한다. 네즈미술관은 그림, 전시, 미술관이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어렵다.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쿠마 켄고가 설계한 네즈는 좌우의 서로 다른 대나무로 만든 입구부터 관람객의 내면 공기를 바꾸어준다.

둘째 날의 일정은 도쿄를 살짝 벗어난 하코네. 도쿄 대부분의 미술관들은 전철을 이용하는 것이 오히려 좋다. 그러나 온천으로 유명한 하코네에 자리 잡은 폴라미술관은 차량 렌트를 추천한다. 도쿄 중심에서 전철을 4번 정도 갈아타야 갈 수 있기도 하지만, 가는 길의 차창 밖 풍경이 아름답다. 숲과 강, 전통 가옥, 소소한 일본식 길을 지나 하코네 센고쿠하라 숲속으로 향하면 인상파 명작들의 안식처인 폴라미술관이 나타난다.

화장품 기업 폴라 그룹이 설립한 이 사립 미술관은 약 1만 점 규모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숲의 자연 지형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건축물의 상당 부분을 지하에 배치했다. 현재 <모네와 21세기의 아트> 특별전을 비롯해 빛과 색채의 변화를 찬미하는 기획전 <스프링 라이징(Spring Rising)>이 열리고 있다. 고흐, 고갱, 세잔, 르누아르 등이 담아낸 자연을 마주한 다음, 몽환적인 정원, 숲, 안개가 이어지는 길을 걸어보자. 예술과 자연이 어떻게 인간의 지친 마음을 치유하고 삶을 정화하는지 깨닫게 된다.

이제 일정은 다시 도심에서 이어진다. 셋째 날 도심 중심부인 롯폰기로 시선을 옮기면 유려한 곡선형 유리 외관이 돋보이는 국립신미술관을 만날 수 있다. 건축가 구로카와 기쇼가 설계한 이곳은 자체 소장품 없이 대규모 기획 전시만을 운영하는 독특한 공간이다. 현재 이곳에서는 6월 10일부터 9월 21일까지 파리 국립 피카소 미술관과 협력한 대형 전시 <Picasso, through the Eyes of Paul Smith(폴 스미스의 시선으로 본 피카소)>가 열리고 있다. 빨강, 노랑, 파랑이 저렇게 아름다운 색이었나. 그림 속 줄무늬가 저런 느낌이었구나. 영국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폴 스미스는 입체파 거장 피카소의 작품을 자신의 또 다른 작품 소재로 만들어버렸다. 피카소전이 아닌 폴 스미스전이었다.

이번 도쿄 미술관 기행은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살아 숨 쉬는 거장들의 철학과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우에노 공원의 촘촘한 문화 거점부터 하코네의 자연 친화적 미술관, 그리고 역사적 건물을 복원한 도쿄 도심의 미쓰비시 1호 미술관까지, 일본이 오랜 시간 다져온 미술 인프라는 그 자체로 거대한 예술 생태계를 이루고 있었다. 압도적인 작품, 전시의 수준보다 더 눈에 띄는 건 백발의 중노년 관람객들의 진지한 모습이었다. 자주 왔을 것이 틀림없을 텐데도 그림 한 점 한 점을 정성껏 바라보는 대부분은 혼자였다. 새롭게 경험하는 여유의 시간들로 문화, 예술, 무엇보다 자신의 내면을 채워가는 여정은 곧 우리에게도 자연스럽게 다가올 것으로 기대된다. 일정을 함께한 이들과 소소한 소감을 나누었다.

일정 중 들르기를 권하는 츠타야서점. 책, 문화, 쇼핑이 한자리에 있는 공간. 
일정 중 들르기를 권하는 츠타야서점. 책, 문화, 쇼핑이 한자리에 있는 공간. 

“수십 년간 생업에 치여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우에노 공원의 고요한 미술관에 서니 비로소 내 마음의 풍경이 명확히 보였습니다. 모네의 '수련' 앞에서 캔버스의 따뜻한 색채들이 은퇴 후의 삶을 얼마나 다채롭게 채워줄 수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일본이 일찍부터 렘브란트와 피카소 같은 거장들의 작품을 방대하게 수집해 인프라를 다져온 점이 놀랍습니다. 공원과 자연 속에 잘 정돈된 예술 공간이 어떻게 실버 세대의 삶을 위로하고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지 직접 체감한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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