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근의 동네서점기행(12)
책이 사람을 진보나 보수로 만들지않아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지을뿐
[고양신문] 인터넷을 둘러보다가 재미있는 주장을 발견했다. “책을 읽으면 진보가 되니까 책을 읽지 마세요!”라는 말이다. 적어도 한때의 나는 이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일수록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고, 그 관심은 자연스럽게 진보적 정치 성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여겼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금방 알게 됐는데 무엇보다 근사한 보수주의자들을 만나면서부터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보다 훨씬 많은 책을 읽었고, 역사와 철학, 경제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개인적으로 독서량과 정치적 성향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나의 편견은 남아 있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적어도 현실 정치와 사회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내가 30대를 함께 보낸 사람들 때문이었다. 주변의 친구들과 동료들은 대부분 책을 읽었다. 선거철이 되면 그들은 마치 월드컵 시즌을 맞은 축구 팬들처럼 열정적이었다. 정치 뉴스를 공유하고 대화 주제로 삼았다. 새벽까지 카카오톡 채팅방에서 떠들면서 개표방송을 지켜봤고, 누군가는 직업으로 정치를 택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때의 나는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고 속단해 버린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서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책을 읽는다. 독서모임을 통해 만나온 그들은 책과 자신의 삶을 연결한다. 소설 속 인물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에세이를 읽으며 자신의 삶을 성찰한다. 어떤 사람은 책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기로 결심했고, 어떤 사람은 책을 통해 가족과의 관계를 혹은 연인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는 장면들을 목격했다.
6월 3일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둔 5월, 나는 당연히 이웃들도 이번 선거에 많은 관심이 있을 거라 넘겨짚고 서점에서 사람들에게 한바탕 선거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럴 수가. 선거 이야기가 나와도 놀랍게도 누구도 내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살고 있는 지역구의 정치인의 이름은 당연히 모르고, 시·도의원과 국회의원의 차이도 알지 못한다. 정치 관련 뉴스를 보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다면 이들은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이 아닌가. 내 경험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새로운 이웃들은 세상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다. 그들은 동네에 새로 생긴 가게를 걱정하고, 이웃의 아이(세리)가 잘 자라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서점에서 열리는 행사에 기꺼이 시간을 낸다. 주말 이른 시간에 게릴라 가드닝에 참여해 꽃을 심고 환경 문제나 돌봄의 문제, 노동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다만 그 관심이 정치 뉴스나 정당 지지로 연결되지 않을 뿐이다.
처음에는 이 모습을 마주했을 때 이 현상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세상에 관심이 있다면 당연히 정치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서점 문을 닫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가만히 이웃들과의 시간을 떠올려 보니 오히려 세상을 좁은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흔히 정치를 뉴스 속에서 찾는다. 국회의사당과 청와대, 시의회와 시청, 선거와 정당에서 찾는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은 넓은 의미의 정치다. 함께 돌봄을 만들고, 동네의 문화를 만들고, 낯선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도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행위다. 서점에서 만난 이웃들은 나에게 그 사실을 보여준다. 이들이 현실 정치에 무관심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공동체를 만들고 있었다. 거창한 구호를 외치지는 않지만 자신이 머무는 공간을 조금 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내가 가졌던 편견은 책을 읽는 사람들을 하나의 유형으로 묶어버린 데서 비롯됐다. 책은 사람을 진보로 만들지도, 보수로 만들지도 않는다. 정치광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다만 책은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게 만든다. 어떤 사람은 책을 읽고 정치 토론장으로 향하고, 어떤 사람은 동네로 향한다. 또 어떤 사람은 가족에게, 친구에게, 혹은 아직 이름도 모르는 이웃에게 다가간다. 사람들은 세상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선거 결과보다 동네의 내일을, 정치인의 이름보다 이웃의 얼굴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전국동시지방선거의 결과가 나온 날 한 손님이 “누가 당선됐어요?”라고 물었다. 사실 그 이름이 뭐가 중요한가.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살아갈 동네가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그리고 그 동네에서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것인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