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근의 동네서점기행(15)
공동체, 커먼즈, 연결, 이웃…
좋은 단어들이지만 적자 가려주지 않아
[고양신문]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열두 달 중 가장 독서하기 좋은 달은 언제일까. 선선한 바람이 불고 해가 짧아지는 가을이 정말 책 읽기에 좋은 계절인지는 잘 모르겠다. 책을 읽는 일은 책의 무게에 비하면 꽤 어려운 행동에 속한다. 고작 몇백 그램짜리 물건을 펼치는 데에도 마음을 먹어야 한다. 책장을 넘기는 일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격주로 진행되는 독서모임 세 개에 참여하고 있는 나에게 독서는 이제 꽤 익숙한 일이 돼버렸다. 한 달에 최소 여섯 권. 그렇다고 매일 책을 펼쳐 드는 성실한 독서가가 된 것은 아니다. 모임 날짜가 다가오면 남은 페이지를 세어보고, 하루에 몇 장씩 읽어야 하는지 계산한다. 때로는 마감 직전에 밀린 숙제를 하듯 책을 읽는다. 독서모임이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 책도 많다.
책을 다 읽으면 독후감을 쓴다. 그런데 한 달에 여러 권을 읽다 보니 어느 순간 책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이기 시작했다. 분명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쓰고 있는데 지난주에 읽은 책의 문장이 끼어들고, 그보다 먼저 읽은 소설의 인물이 생각난다. 어쩌면 이것도 독서의 한 방식일 것이다. 책 한 권을 깔끔하게 이해하고 덮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읽은 책 위에 다음 책이 쌓이고 서로 뒤섞이는 것.
서점을 운영하면 하루 종일 책을 읽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손님이 없으면 책을 읽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손님이 없으면 손님이 왜 없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이번 달 매출을 확인하고, 인터넷의 서평들을 뒤지며 주문할 책을 고르고, 곧 있을 행사의 포스터를 만든다. 책을 펼쳐 몇 장 읽다가 문이 열리면 인사를 하고,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가 휴대전화를 확인한다. 책으로 가득한 공간이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책 읽기 좋은 곳은 아니다. 놀기는 좋다.
서점을 시작하고 나서 책을 주제로 이야기하는 일은 많아졌다. 동네 사람들과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대만과 일본의 작은 서점 사람들과도 같은 책을 읽고 감상을 주고받았다. 책 한 권을 읽는 일은 혼자 하는 일인데, 이상하게도 다 읽고 나면 사람을 만나게 된다.
세리서점이 문을 막 열었을 때는 책이 사람을 불러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책을 보고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시 오는 이유가 꼭 책 때문인 것은 아니었다.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전시를 보고, 같이 달리고 풋살을 하러 온다. 그렇게 만난 사람이 어느 날 책을 산다. 반대로 책을 사러 왔던 사람이 어느 날 모임에 앉아 있기도 한다. 이제 무엇이 먼저인지 잘 모르겠다. 책과 사람과 마을은 서로 뒤섞여 관계를 만든다.
그러다 보면 이상한 날을 보내게 된다. 책은 한 권도 팔리지 않았는데 하루 종일 사람이 있었던 날이다. 저녁이면 테이블을 옮기고 의자를 꺼낸다. 모임이 끝나도 사람들은 바로 집에 가지 않는다. 서서 이야기를 계속하고, 누군가는 서점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누군가는 술을 마신다. 마지막 사람이 돌아간 뒤 혼자가 된 서점에서 매출을 확인한다.
책 판매 0원.
조지 오웰은 헌책방에서 일했던 경험을 쓴 『서점의 추억』에서 서점을 “돈을 쓰지 않고도 오랫동안 서성거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라고 했다. 1936년 런던의 서점이나 지금 동네의 작은 서점이나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서점이라는 곳은 이상하게 사람에게 오래 머물 이유를 준다. 문제는 오래 머무는 것과 책을 사는 것이 반드시 같은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서점이라는 이름의 동네 사랑방을 운영하고 있는 걸까. 서점은 책을 팔아야 살아남는다. 임대료를 책으로 낼 수 없고 전기요금을 독후감으로 낼 수도 없다. 아무리 좋은 모임을 열고 사람들이 서로 친구가 되어 돌아가도 책이 팔리지 않으면 결국 문을 닫아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북적이는 날에도 계산대에 찍힌 책이 몇 권인지 슬쩍 확인한다.
공동체, 커먼즈, 연결, 이웃.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이다. 하지만 좋은 단어들이 통장의 적자를 가려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가끔은 이런 말들을 이용해 책이 팔리지 않는 현실을 그럴듯하게 위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그래도 책이 아니었다면 이 사람들이 여기서 만났을까. 책을 사지 않는 날에도 사람들이 서점에 오는 것이 정말 서점의 실패일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마 이 두 질문 사이에서 계속 장사를 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아무것도 사지 않아도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을 만들면서, 동시에 그곳에서 무언가를 사달라고 말해야 한다. 서점 주인이라는 직업의 이상한 점이다.
독서의 계절인 가을이 왔다. 독서의 계절이니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세리서점에도 사람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책도 한 권씩 사갔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