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책속으로 떠나는 여행
(16) 이태준 <해방전후>

살기 위해 타협했던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혼란과 좌우대립 겪으며
작가의 내면 변화 담담하게 고백

일제라는 억압이 사라진 순간
실천적 지식인으로 거듭났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에 다시 휩쓸려

서울 성북동 자택 수연산방 앞에서 찍은 1940년대 초 상허 이태준의 모습. 수연산방은 현재 전통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열화당 제공
신탁통치 반대운동

[고양신문] 지난달 한 연예인의 집안 자랑을 계기로 한동안 친일 논쟁이 이어졌다. 정치인 중에도 친일 조상을 가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만 이렇게 비난이 거세게 일거나 논란이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대중들에게 가장 만만한 대상이 연예인이기 때문일까, 같은 잘못을 해도 연예인이 더 심하게 대중의 먹잇감이 되는 것 같다. 
일제 강점기에 돈 혹은 출세를 목적으로 자진해서 친일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조선인 헌병보조원을 모집하는데 지원자가 너무 많아 예정보다 숫자를 늘렸다는 사실은 우리를 절망시킨다. 물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한 경우도 있었다. 일제 말기에 조금이라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 특히 대중에게 친숙한 문인들은 친일을 피하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일본 경찰의 직접적인 압박으로 혹은 밥벌이의 수단이 글쓰기밖에 없었기 때문에 친일적인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진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거나 체포되어 투옥과 고문을 당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때문에 친일은 어떠한 경우든 변명이 될 수 없다는 주장도 타당하다. 
그렇다면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난 이날을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맞이했을까. 이태준의 『해방전후』는 그때의 상황을 지식인 입장에서 예리하게 포착한 소설이다. 상허 이태준은 1930년대에 빼어난 단편으로 높은 평가를 받던 작가이다. 특히 보잘것없는 인물들의 평범한 일상을 유머와 페이소스로 포착해 내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변두리 삶을 살아가는 불우한 인물들이 그의 손에서 선명하게 살아나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그는 문단활동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프로문학에 대립하는 이른바 ‘순수문학’의 대표적 단체인 구인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고, 당시의 대표적 문예지 <문장>의 편집을 맡았다. 그런 작가가 해방후에 좌익활동을 하다가 월북하였고, 그의 이름은 오랫동안 한국문학에서 지워졌다. 
1946년에 발표한 『해방전후』는 작가 자신이 일제 말기 자신의 행적을 되돌아보면서 ‘지식인의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고백한 자전적 소설이다. 폭력적인 전시 체제 앞에서 지식인이 겪었던 무력감과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협력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이 솔직하게 그려져 있다. 과거의 행적에 대해 침묵하거나 이를 합리화하려 했던 다른 문인들에 비해 이태준은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당대 지식인이 겪은 수치심과 타협의 과정을 정직하게 고백함으로써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반면에 자기변명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수많은 정당과 단체가 난립하던 해방 정국의 혼란과 극단적인 좌우 대립의 양상이 생생하게 그려진 작품은 시대의 증언으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서울 성북동 자택 수연산방 앞에서 찍은 1940년대 초 상허 이태준의 모습. 수연산방은 현재 전통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열화당 제공
서울 성북동 자택 수연산방 앞에서 찍은 1940년대 초 상허 이태준의 모습. 수연산방은 현재 전통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열화당 제공

작가 자신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 현은 적극적인 투사형 인물은 아니다. 그는 일제 말기 시국에 협력하는 글을 강요하는 식민지 당국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고향 철원에서 가까운 산골로 낙향한다. 낚시질로 소일하면서 이 시국을 견디려 했지만 기대와 달리 손바닥만한 시골에서 당국의 노골적인 압력은 더 피하기 어려웠다. 낚시질까지 감시당하는 상황에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하게 된다. 더 큰 말썽을 피하기 위해 『대동아전기』의 번역을 맡은 것이다. 일본의 패전기라면 몰라도 일본에 유리한 전기(戰記)를 자기 손으로 주무르는 것에 자괴감을 느끼면서 그는 “정말 살고 싶었다. 살고 싶다기보다 살아 견디어내고 싶었다”라고 고백한다. 훼절을 강요당하는 지식인의 절박한 심정이 단말마의 비명처럼 들린다. 
현은 이 산골마을에서 구식 노인 김직원을 만난다. 그는 삼일운동 때 감옥살이로 서울에 끌려온 일을 제외하곤 조선이 망한 이후 한번도 총독부가 있는 서울에 오기를 피한 이다. 창씨개명도 안 하고 버틸뿐 아니라 감옥에서 나온 날부터 다시 상투요 갓이었다. 현보다 수십 년 연장이지만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독립이 된다면 다시 이씨 왕조를 모시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친다. 현은 실망했지만, 그것은 임금에 대한 충성보다도 일본이 망하게 한 나라를 그들 보란 듯이 그대로 다시 살리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현은 서울 문인보국회에서 문인궐기대회에 나오라는 전보를 받는다. 그가 서울에 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주재소의 순사를 비롯한 모두가 관심깊게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등 떠밀리듯 서울에 온 현은 조선 문단 생긴 이래 처음 보는 어마어마한 집회에도 놀랐지만, 만주국 작가의 서투른 일본말 축사보다 조선문인들의 유창한 일본말이 더 얄미운 야릇한 심사를 느낀다. 결국 그 자리에서 발언하지 않기 위해 자기 순서가 오기 전에 슬그머니 빠져나온다.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이 가지만 차마 ‘구린 내용’의 일본어를 배설할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8.15가 닥쳤다. 시골에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가 버렸고 현은 서울 친구의 전보를 받고 급히 상경한다. 그러나 도중에 만난 시골 사람들은 일본의 패망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한 영감님은 “어떤 세상이라고 똑똑히 모르는 걸 입을 놀리겠소?” 하며 몸을 사린다. 조선의 독립을 감격으로 맞기보다 어떤 세상이 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다. 사람이 오래 압제에 시달리다 보면 바보가 되는 것인가. 현은 동포들의 얼빠진 꼴이 울고 싶게 슬프다고 했지만, 일제 치하에서 겪은 일들은 광복의 날에도 마음놓고 기뻐할 수 없게 만들었다. 8월 17일 청량리역에 도착했으나 서울 사람들도 냉정하고 태극기도 보기 드물었다. 오히려 독오른 일본 군인들이 예리한 무장으로 길목을 지키고 <경성일보>의 논조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광복을 맞이한 감격, 태극기를 든 사람들의 물결과 함성, 움츠러든 일본인들 같은 우리의 상상을 배반한다. 함석헌 선생의 말씀처럼 ‘도둑같이 온 해방’이었기 때문일까. 경성의 조선인이나 일본인이나 상황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서울 성북동 자택 수연산방 앞에서 찍은 1940년대 초 상허 이태준의 모습. 수연산방은 현재 전통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열화당 제공
해방전후 표지

해방을 맞이한 서울은 정당과 단체가 난립하고 이념적 대립과 테러가 판치는 혼란의 장으로 그려진다. 현은 좌익의 극단적 계급혁명론에 거부감을 느꼈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기우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온건한 민족화합론을 내세운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선언문에 서명한다. 프로문학에 반대하고 순수문학을 옹호했던 작가 이태준이 해방 후 현실 참여와 좌익 문학운동으로 나아가게 되는 내면의 변화가 가감없이 그려진다. 순수문학에서 좌익 문학가로의 변화가 극적으로 보이지만,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소싯적에 휘문고보를 다니다가 동맹휴학 주모자로 퇴학당한 경력도 있다. 민족의 현실 앞에서 내면의 번민을 끌어안고 뭔가 일을 저지르고 싶은 충동도 있었으나, 자신이 아무런 준비도 없었고 오랫동안 굳어버린 성격의 껍데기를 깨트릴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단편소설에서 보여주었던 예술적 기량은 뛰어났지만 현실에서 무언가를 할 수 없었던 그가 이제 일제라는 억압의 사슬이 사라진 순간 실천적 지식인으로 거듭난다. 조선문학가동맹 등 좌익 진영에 가담함으로써 진보적 지식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는 진솔하게 보여준다. 이승만이 조선 민족 모두를 끌어안겠다는 주장 속에 민족반역자들과 모리배들이 다시 준동하는 것에 위험을 느낀 것도 이러한 변화에 한몫 했을 것이다. 
정국은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찬탁과 반탁으로 갈라졌고, 현과 김직원도 이에 대한 의견대립으로 끝내 갈라서고 만다. 좌익문학운동이라는 적극적인 실천 가운데 그는 여전히 지도적 역할을 했으며 그것은 1946년 월북으로 이어졌다. 프로문학과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로서는 엄청난 변화였다. 그러나 월북 이후 북한 체제에 부응하는 작품들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남로당계 인사들의 숙청 바람에 휩쓸려 불우한 일생을 마친다. 작가로서 지식인으로서 자신에게 성실했던 인물이 역사의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사라진 사실은 민족사의 비극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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