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에서 만난 미술 이야기
④ 아직 끝나지 않은 그녀의 춤

[고양신문] 미술관을 거닐다 보면 어느 순간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을 따라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랑했던 시간도, 상처받았던 시간도 지나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노장 쉬르 센에서 까미유 클로델의 작품들을 따라 걷던 그날, 내게 오래 남은 것은 뜻밖에도 그녀의 불행이 아니었다.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았던 눈, 그리고 그 눈으로 발견한 순간들을 흙과 돌과 청동에 붙잡아두려 했던 한 조각가의 시간이었다.
작은 작품 하나가 눈길을 붙잡았다. 네 명의 여인이 좁은 공간에 바짝 모여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다 떠는 여인들’이다. 한 사람이 말을 꺼내자 다른 이들은 놓칠세라 몸을 기울이고 귀를 모은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인지 바라볼수록 그들 사이에 감춰진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까미유 클로델 '수다 떠는 여인들'. 1893년. 필자 제공
까미유 클로델 '수다 떠는 여인들'. 1893년. 필자 제공

‘수다 떠는 여인들’은 까미유가 기차 객실에서 본 여성들의 모습에서 착상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장면을 기억해두었다가 작업실로 돌아와 모델 없이 조각으로 옮겼다고 한다. 거창한 신화도 영웅도 아니었다. 스쳐 지나갈 수 있었던 사람들의 몸짓과 일상의 한순간을 자기만의 조각으로 만들어냈다. 그 작은 작품 앞에서 나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까미유를 만났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여인도, 로댕의 곁에 있던 제자도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을 오래 바라보고 그 안에서 조각이 될 순간을 발견하던 한 사람의 예술가였다. 예술가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어쩌면 모두가 보고도 그냥 지나쳐버린 것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까미유를 이해하려면 그녀가 누구를 사랑했는가보다는 그녀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실을 더 들어가자 분위기는 달라졌다. '페르세우스와 고르곤'이 눈앞에 나타났다. 페르세우스는 자신이 베어낸 메두사의 머리를 높이 들고 있다. 신화에서는 영웅의 승리를 보여주는 순간이지만, 이상하게도 내 시선은 승리자보다 잘려나간 메두사와 쓰러진 몸에 오래 머물렀다. 대리석의 차가운 표면에서 승리의 환희보다 묘한 긴장과 쓸쓸함이 먼저 다가왔다.

까미유 클로델 '페르세우스와 고르곤'. 1897년경 구상, 1902년 대리석 완성. 필자 제공
까미유 클로델 '페르세우스와 고르곤'. 1897년경 구상, 1902년 대리석 완성. 필자 제공

그 무렵 그녀의 삶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에 대한 불신과 불안은 깊어졌고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파괴하기도 했다. 1913년 빌에브라르(Asile de Ville-Évrard) 병원에 수용되었고, 이듬해 몽드베르그(Asile d'aliénés de Montdevergues) 정신병원으로 옮겨진 뒤 194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그러나 나는 그 마지막 30년만으로 까미유의 생을 기억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 사람의 예술가를 가장 불행했던 시간만으로 기억하는 것 역시 그를 또 하나의 틀 안에 가두는 일이 아닐까. 그녀가 누구 때문에 상처받았는가 못지않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그 상처 너머에서 자신의 눈과 손으로 어떤 조각을 만들어냈는가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품고 다시 전시실을 걷다가 '왈츠' 앞에 섰다. 전시실에는 조금씩 다른 모습의 '왈츠'들이 있었다. 같은 춤인데도 어느 하나 똑같은 순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재료와 조합에 따라 두 사람의 몸과 그들을 감싸는 옷자락도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한 작품만 보았을 때는 사랑이 먼저 보였지만, 네 개의 '왈츠'를 바라보고 있으니 사라지는 순간의 움직임을 붙잡으려 했던 조각가의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까미유 클로델 '왈츠' 청동 주조는 1895-1905년. 필자 제공
까미유 클로델 '왈츠' 청동 주조는 1895-1905년. 필자 제공
까미유 클로델 왈츠 연작들. 필자 제공
까미유 클로델 왈츠 연작들. 필자 제공

그 가운데 한 작품 앞에서 오래 발길이 머물렀다. 남자는 여인의 허리를 감싸고 여인은 그에게 온몸을 기울인다. 두 사람의 얼굴은 맞닿을 듯 가까이 있고, 여인의 몸을 감싼 옷자락은 춤의 회전을 따라 흘러내린다. 몸은 한쪽으로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는데도 금방이라도 다음 발을 내디딜 것 같다. 움직이지 않는 조각 속에 움직임이 있고, 차가운 재료 안에서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는 듯했다. 처음에는 사랑하는 두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오래 바라보고 있으니 그것만은 아닌 듯했다. 서로를 붙잡고 있는 것인지, 서로에게 기대야만 쓰러지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만나고 사랑하고, 기대고 상처받고, 때로는 누군가를 놓아주면서도 우리는 다시 한 걸음을 내디딘다. 살아간다는 것도 어쩌면 이런 춤과 닮아 있는 것은 아닐까. 전시실을 천천히 돌아보고 미술관을 나왔다. 문을 나서자 다시 노장 쉬르 센의 여름이었다. 조용한 거리를 따라 역으로 향했다. 처음 이곳에 올 때와 같은 길인데 돌아가는 마음은 조금 달랐다. 얼마 뒤 파리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거나 창밖을 바라보며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미술관에서 만났던 '수다 떠는 여인들'이 떠올랐다. 까미유도 오래전 어느 기차 안에서 사람들을 이렇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누군가의 말과 작은 몸짓을 눈에 담아두었다가 작업실로 돌아가 조각으로 되살려냈을 것이다. 백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기차도, 옷차림도,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는 것도 달라졌지만 저마다 자신의 시간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리 달라지지 않은 듯했다.

노장 쉬르 센에서 파리로 돌아가는 기차안의 풍경. 필자 제공
노장 쉬르 센에서 파리로 돌아가는 기차안의 풍경. 필자 제공

기차가 속도를 내자 노장 쉬르 센의 들판과 작은 마을들이 창밖으로 빠르게 밀려났다. 한참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미술관에 남겨두고 온 '왈츠'가 떠올랐다. 서로에게 몸을 기댄 두 사람은 지금도 그 자리에서 다음 발을 내디디려 하고 있을 것이다. 까미유를 만나러 왔던 길이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에는 그녀의 불행보다 그녀가 남긴 조각들이 더 오래 마음에 머물렀다. 그제야 분명해졌다. 내가 이 작은 도시까지 찾아온 것은 비운의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로댕의 연인으로 기억되는 까미유도, 상처와 고독 속에서 긴 세월을 보낸 까미유도 아닌,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손으로 사랑과 욕망, 상실과 기다림을 빚어냈던 한 사람의 조각가, 까미유 클로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만남은 짧았지만 그녀의 조각이 남긴 여운은 길었다. 아마 오래도록 그럴 것이다. 어느 날 문득 '사쿤탈라'의 포옹이 떠오르고, '성숙의 시대'의 멀어지는 뒷모습이 생각나고, '간청'의 내민 두 손과 '왈츠'의 흔들리는 몸짓이 다시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올지도 모른다. 기차는 어느새 파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노장 쉬르 센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까미유는 조금도 멀어지지 않았다.
그날 나는 한 사람의 불행을 보고 돌아온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한 예술가를 만나고 돌아왔다. <끝>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