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전 박황희의 노변정담(14)
-진퇴지절(進退之節)
소학 "진퇴의 절도는 군자의 길"
어린아이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
"진퇴존망 알면서 도를 잃지 않음"
주역, 군자의 최고 경지로 삼아
논어 맹자도 적기에 물러남 강조
정치인 퇴장 책임있게 결단해야
[고양신문] ‘진퇴(進退)’는 단순히 나아가고 물러서는 행위를 뜻하지 않는다. 유교에서는 예(禮)의 실천을, 『주역』에서는 때(時)를 아는 지혜를 의미한다. 같은 ‘진퇴’라는 말이지만, 하나는 사람을 대하는 도리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이다.
동양 고전에서 인간의 삶은 언제나 ‘나아갈 것인가’, ‘물러설 것인가’라는 선택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군자는 ‘재능’보다도 ‘분수’를 먼저 배우고, ‘용기’보다도 ‘절제’를 먼저 익혔다. 진퇴를 모르는 용기는 무모함이 되고, 진퇴를 모르는 지혜는 잔꾀가 되기 쉽다. 결국 진퇴란 단순한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의 깊이와 시대를 읽는 안목을 함께 요구하는 삶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일곱 살 무렵부터 『소학』을 배우게 했는데, 가장 먼저 익히는 것이 바로 ‘쇄소응대 진퇴지절(灑掃應對, 進退之節)’이었다. 곧 물을 뿌려 청소하고, 사람을 맞이하고 응대하는 일상에서부터 웃어른 앞에서의 몸가짐, 출입하는 예절, 말해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 나설 때와 물러설 때의 분수를 배우게 했다. 여기서 ‘절(節)’이란 절도와 분수이며, 자신을 다스리는 예법이다. 결국 『소학』의 ‘진퇴지절’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생활윤리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화려한 지식과 기술은 배우지만, 정작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언제 침묵해야 하는지, 언제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언제 한 걸음 물러서야 하는지는 배우지 못한 채 사회로 나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인간관계의 갈등도 대부분 능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진퇴의 절도를 잃은 데서 비롯된다. 『소학』이 어린아이에게 가장 먼저 가르친 것이 바로 ‘진퇴지절’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간다운 사회는 거창한 이념보다 일상의 예절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선현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주역』은 ‘진퇴’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이야기한다. “나아감과 물러남, 존재와 소멸을 알면서도 바른 도를 잃지 않는 이는 오직 성인뿐이다. [지진퇴존망(知進退存亡), 이부실기정자(而不失其正者), 기유성인호(其唯聖人乎)]”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성공과 실패를 예측하는 능력이 아니다. 언제 나아가고 언제 물러나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그 과정에서 자신의 도(道)와 ‘정도(正道)’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주역』은 처세술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시의(時宜)’와 ‘도의(道義)’를 함께 묻는 철학서이다.
『주역』은 변화의 책이다. 세상에는 영원한 상승도 없고, 영원한 몰락도 없다.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과 겨울이 찾아오듯이 인간의 운명 또한 흥망성쇠를 반복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신의 능력만을 믿지 않고 시대의 흐름을 살핀다. 시세를 거스르는 용기는 객기가 되기 쉽고, 시세만 좇는 처세는 기회주의가 되기 쉽다. 『주역』은 이 두 극단을 모두 경계하며, 시대를 읽되 도를 잃지 말라고 가르친다.
『소학』의 ‘진퇴지절’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가르친다면, 『주역』의 ‘지진퇴존망(知進退存亡)’은 “언제 행동할 것인가”를 가르친다. 행동의 예절과 시대를 읽는 지혜가 함께할 때 비로소 군자의 삶이 완성된다.
공자는 『논어』에서 말하였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나아가 벼슬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자기의 뜻을 감추고 물러나야 한다. [방유도즉사(邦有道則仕), 방무도즉가권이회지(邦無道則可卷而懷之)].” 그러므로 나아감만이 용기가 아니며, 물러남 또한 또 다른 용기임을 일깨워 준다.
역사를 보면 위대한 인물들은 대개 물러설 줄을 알았다. 때가 아니면 기다렸고, 명분이 없으면 나서지 않았으며,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면 미련 없이 후진에게 길을 내주었다. 반대로 역사 속 많은 비극은 물러나야 할 사람이 끝내 자리를 놓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권력에 대한 집착은 결국 자신을 무너뜨릴 뿐 아니라 공동체까지 병들게 만든다.
맹자 역시 같은 의미의 말을 한다. “비록 지혜가 있더라도 때를 잘 타는 것만 못하다[수유지혜(雖有智慧), 불여승세(不如乘勢)].” 『주역』 계사전에도 같은 뜻을 전한다. “군자는 조짐을 보면 즉시 행동하며, 하루가 다 가기를 기다리지 않는다[견기이작(見幾而作), 불사종일(不俟終日)].” 그러나 조짐을 읽는 눈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행동이 사사로운 욕망이 아니라 공의(公義)를 향할 때 비로소 진정한 진퇴가 된다. 그래서 『주역』은 “진퇴와 존망을 알면서도 바른 도를 잃지 않는 것(知進退存亡而不失其正)”을 군자의 최고 경지로 삼았다.
인생을 돌아보면 진퇴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너무 일찍 나서면 경솔함이 되고, 너무 늦게 나서면 기회를 잃는다. 너무 오래 머물면 집착이 되고, 너무 쉽게 물러나면 책임을 저버린다.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차이는 능력의 크기보다도,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얼마나 분명히 알았는가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인생의 후반부에 이르러 비로소 많은 사람이 깨닫는 것이 있다. ‘더 열심히 살 걸’이 아니라 ‘그때 물러설 줄 알았더라면’, ‘그때 한 걸음 더 나아갔더라면’ 하는 후회이다. 진퇴는 결과를 안 뒤에는 누구나 말할 수 있지만, 결과를 알 수 없는 순간에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은 극히 어렵다. 그래서 진퇴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통찰’의 문제이며, ‘경험’의 문제이고, 결국은 ‘인격’의 문제인 것이다.
예부터 “때를 잃은 봉황은 닭만도 못하다[실시봉황 불여계(失時鳳凰 不如鷄)]”라고 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과 높은 이상을 지녔더라도 시대를 읽지 못하고 때를 놓치면 평범한 사람보다 못한 결과를 맞게 된다는 뜻이다. ‘재능’보다 중요한 것은 ‘시기’이며, ‘용기’보다 중요한 것은 ‘절제’이다.
그러나 반대로 시대만 좇고 원칙을 버리는 사람도 오래가지 못한다. 『주역』이 강조하는 것은 ‘시기’가 아니라 ‘시기에 맞는 정도(正道)’이다. 때를 안다는 것은 유행을 좇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책임을 아는 것이며, 물러난다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다음 시대를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오늘의 정치 또한 다르지 않다. 정치는 권력을 얻는 기술이 아니라, 국민과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는 공공의 도덕이어야 한다. 나설 때를 아는 정치인은 많지만, 물러설 때를 아는 정치인은 드물다. 권력은 잡는 것보다 내려놓는 일이 더 어렵고, 승리는 얻는 것보다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일이 더 어렵다.
정치의 계절이 올 때마다 우리는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하지만, 그보다 먼저 정치인들은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지금 정치무대에 나서는 것이 시대의 부름인가, 개인의 욕망인가. 지금의 퇴장이 책임 있는 결단인가, 아니면 미련과 집착의 다른 이름인가. 진퇴의 판단은 정치적 계산이 아니라 시대에 대한 양심에서 출발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선거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절제에서 완성된다. 권력을 얻는 과정에도 품격이 있어야 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도 절제가 있어야 하며, 권력을 내려놓는 순간에도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 국민은 오래 집권한 사람보다 오래 신뢰받는 사람을 기억한다. 권력은 유한하지만, 품격은 오래 남고, 직책은 사라지지만 인격은 역사에 기록된다.
결국 ‘진퇴지절’은 출세의 기술이 아니라 삶의 품격이다. 인생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지만, 그 선택을 빛나게 하는 것은 힘이 아니라 절도이며 속도가 아니라, 때를 읽는 안목이다. 『소학』이 사람의 몸가짐을 가르쳤다면, 『주역』은 사람의 시간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 두 가르침이 하나로 만나는 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삶의 깊이를 얻는다.
진퇴는 결국 자신을 이기는 공부이다. 욕심은 늘 앞으로 나아가라고 재촉하지만, 지혜는 때로 한 걸음 물러서라고 말한다. 세상은 성공한 사람을 부러워하지만, 역사는 물러날 줄 알았던 사람을 존경한다. 아름다운 은퇴가 아름다운 출발만큼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진퇴지절을 깨닫는 일은 단순한 처세의 요령이 아니라 평생을 걸쳐 닦아야 할 인격의 공부이며, 정치를 비롯한 모든 공적 삶에서 끝내 잃지 말아야 할 최고의 지혜이다. 『소학』과 『주역』이 수천 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살아 있는 가르침을 전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람은 재능으로 성공할 수는 있어도, ‘진퇴를 아는 지혜’로 존경받는다. 그리고 한 사람의 품격은 얼마나 높이 올랐는가보다, 언제 어떻게 물러설 줄 알았는가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