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난 피해 고양 피난 오며 정착 … 종중 발전 위해 노력

▲ 인동 장씨 종친회 묘역에서 내려다 본 성사동 마을 전경. 인동 장씨는 이 일대에서 끈끈한 유대를 자랑하며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사라지는 씨족마을에 대한 기록 (20) - 인동 장씨 집성촌 성사동

취재조사 | 박기범 기자, 고양시 씨족협의회
도움말|인동 장씨 사직공파 종친회

인동 장씨는 성사동, 도내동, 식사동 등에서 거주하며 지역의 토박이 종중으로 번창해 왔다.
망향 제단을 만들어 조상의 은혜를 기리고 종인 간의 끈끈한 우애를 다지며 살아왔다. 고양신문은 고양시씨족협의회와 함께 집성촌을 찾아 그들의 삶의 모습과 조상의 모습을 엿보고자 한다. 고양신문과 고양시씨족협의회의 조사가 완료되는 순서에 따라 11월 28일 인동 장씨 사직공파 종친회를 찾았다. <편집자>

임진왜란 피해 자식 안고 입향

인동 장씨는 성사1, 2동 부근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400여 년을 고양에서 살아왔다. 1591년(선조 24년) 무과에 급제한 장희한은 임진왜란 중 황해도 지역으로 침입한 왜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와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그러나 장희한은 1597년 전사하게 되고 진중이 파괴되자 양민학살을 우려한 장희한의 처, 진주 강씨가 두 아들 장흥주와 장지주를 품에 안고 배를 얻어 타고 고양현 대장리(지금의 덕양구 대장동 추정)로 피신하게 된다. 고양 지역의 주교동과 식사동은 과거에 배가 들어왔던 곳이다.

진주 강씨는 이 곳에서 수소문 끝에 당시 식사리에 거주하는 시숙의 도움을 받아 은거한다. 이렇게 정착 후 인근 성사동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게 된다. 진주 강씨의 묘는 당초 주교동에 있었으나 묘역 일대가 마상공원으로 개발되면서 화장해 성사동에 재단을 세웠다. 임진왜란 후 조정에서는 장희한의 공로를 인정, 정3품인 통정병조참의직을 내리고 그의 부인 진주 강씨를 숙부인으로 봉직했다.

▲ 뒷줄 왼쪽부터 장석형 장석배 장석영 장석하 장석율 장석진 (앞줄 왼쪽부터) 장석전 장석태 장석정 장석철 장기출

독립운동가 장흥 선생, 골프선수 장정 배출

성사동 인동장씨 출신의 장흥 선생은 고양 시사에도 기록돼 있는 유명한 인물이다. 장흥 선생은 황포군관학교를 마친 뒤 중국군에 입대해 복무하던 중 김원봉의 권유로 의열단에 가입했다. 1931년 난징의 헌병사령부에 재직 중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 일본군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해 당에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35년에는 난징장정총대기요간부로 있으면서 신한독립당계 50여명을 장정명단에 올려 그들이 보급품을 받도록 하는 등 독립운동을 측면에서 도왔다. 1942∼1945년까지 헌병 영장으로 재직하면서 포로관리 및 일본군에 징용된 한국인의 분리 수용과 보호를 맡아 이들을 광복군으로 전출, 편입시키는데 힘썼다.

특히 쑤저우에 주둔한 일본군 내 한국인사병 정희섭, 성동준 등 수십명을 집단 탈출시켜 광복군에 편입시켰다. 광복회 참모로서 광복 후 교포의 안전귀환을 지원하였으며 광복회 부회장을 지냈다.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이 수여됐다.

종친회 관계자는 “일제 강점기에 만주에서 김구 선생을 도와 광복군 소장으로서 독립 운동을 한 장흥 선생은 해방과 더불어 헌병사령관이 됐다. 1949년 6월 26일에는 김구 선생의 저격 피살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주모자 안두희 소위를 구속 수사하려 했으나 당시의 친일 배후 세력에 의해 오히려 헌병 사령관직에서 해직, 전방 사단장으로 밀려나게 된다”고 설명했다.
골프 선수인 장정 선수도 성사동 인동 장씨 출신으로 집안에 행사가 있을 때 간혹 참석한다고 한다.

60여 가구 모여 살며 우애 과시

인동 장씨는 한 때 60여 가구가 모여 살았으며 현재는 2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다. 불과 5년 여 만에 집성촌의 규모가 줄어들었는데, 이 일대가 과거 30여 년 간 그린벨트로 묶여 각 종 개발이 규제돼 왔기 때문이다. 성사동 일대는 2007년에서야 마을의 일부가 그린벨트에서 해제 됐다.

장석율 총무는 “결혼을 하고 독립된 가정을 이뤘지만 그린벨트 지역이기 때문에 고향인 성사동에서 집을 짓고 살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 둘 집성촌을 떠나기 시작해서 오늘날은 20여 가구만이 남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성사동은 인동 장씨 이외에는 타성이 드물었고 같은 성씨가 모여 살다보니 서로간의 우애가 깊었다. 농사를 지을 때면 서로서로 일손을 나누고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면 종중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내 일처럼 도우면서 결속력을 높여왔다. 인동 장씨는 지금도 뛰어난 단합력을 자랑한다.
인동 장씨는 지역의 발전과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가졌다. 장석하 씨의 아버지 장기창 씨는 해방 전의 어렵던 시절에도 마을에 글방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열성을 다했다. 장석하 씨는 “해방 전이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도 어렵던 시절이다. 학문을 익히고 배운다는 것은 더 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그 시절 아버지는 글을 배울 수 있는 강습소를 세우고 한글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어르신들 중에서도 이 곳에서 한글을 배우신 분들이 많았다. 서울에서 모셔온 선생님이 우리 집에 같이 살기도 했다. 삶이 힘들 때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생각하시고 강직하게 살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힘이 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 선조들의 유해가 안장된 묘역 일원.

갈대로 삿갓 만들어 용돈벌이

성사동은 농사를 크게 짓기에는 산이 인접해 있어 어려움이 있었다. 마을의 앞과 뒤가 모두 산으로 그 사이에 약간의 농경지만이 있었을 뿐이다. 농사의 규모가 작다보니 생활의 여유가 넉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구들이 농사를 중심으로 살아가던 시절 성사동의 인동 장씨는 삿갓과 참외 재배로 생활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 강매동 매화정 마을에는 갈대가 많았는데, 그 갈대를 사다가 삿갓을 만들었다고 한다. 삿갓을 만들기 위해 매화정 마을에서 마차로 갈대를 실어오기도 했다고 한다.

장기출 씨는 “농번기 때도 밤에는 집집마다 모여서 삿갓을 만들었다. 하룻밤에 15개씩도 만들었고, 삿갓을 만든다고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도 정겹게 나누었다. 삿갓을 만들다가 바구니를 만들기도 하고 그랬다”라며 그 때를 회상했다.

갈대 한 단이면 삿갓이 몇 백 개를 만들 수 있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삿갓은 강화나 충청도로 많이 팔렸다. 삿갓을 판돈은 용돈을 쓸 정도의 수입은 됐다고 한다.

뿌리에 대한 젊은 세대 무관심 안타까워

장석철 종친회장은 “요즘 사람들은 뿌리나 족보에 대한 관심이 없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급급한 것 같다”며 변해 가는 세태에 대해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집성촌들은 점차 그 규모가 축소되고 있다. 종친회 활동에서도 어린 종인들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집성촌에 거주하는 사람들조차 종인들이 외지에 나가서 사는 것을 세월의 변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더구나 고양 지역은 각 종 개발이 진행 중이거나 예정돼 있어 집성촌에 거주하는 사람들로서는 세월의 변화 속도가 더 빠르게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종친회의 중요성에 대해 더욱 실감하고 있다.

이와 관련 장석철 종친회장은 “우리는 종친회 활동을 통해 종인들의 결속력을 더욱 높이기 위해 노력 중이다. 조상에 대한 시제를 정성 들여 준비하고 이 과정을 통해 종인들이 하나됨을 느끼고 발전할 수 있다”며 앞으로도 발전하는 종친회로 거듭나기 위해 종친회장으로서 노력할 것임을 밝혔다.

장희한 부인 진주 강씨, 아들 성장하자 편지 남겨

▲ 고양으로 피난 온 진주 강씨가 아들이 7세가 되던 해에 쓴 편지.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고양으로 피난을 온 진주 강씨. 그녀의 노력으로 인동 장씨는 고양에서 번창할 수 있었다. 아직 젖먹이였던 아들을 안고 고양으로 내려온 진주 강씨는 아들이 7세가 되던 해 아들에게 한글로 된 편지를 한 통 남긴다.

이 편지는 안타깝게도 원본은 찾을 길이 없고 복사본만이 전해지는데, 이 편지를 보관해 온 장석하씨는 “나의 삼촌이 어느 날 내게 이것을 보여주더니 잘 보관하라고 했다”며 편지를 공개했다. 편지를 살펴본 고양시씨족협의회와 정후수 한성대 국문과 교수는 원본이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4백년이 넘은 이 편지가 귀중한 가치를 지닌 다고 평가했다. 편지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무곡골에서 봉사 직책 장희한의 전사 소식을 듣고 자식의 생명을 구하기로 마음먹고 너 흥주 업고 패물과 돈을 챙겨 배를 빌려 덕양현 대장동에 도달했다. 시숙이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해줘 살 수 있었다. 이제 너의 나이 7세이니 시숙의 은혜를 잊지 말고 후손들에게도 전하라. 너는 인동 장씨 태산경 9세손이니 글 읽기를 게을리 하지 말고, 몸가짐을 바르게하고 충효를 잊지 말아라. 병신년 칠월 그믐 진주 강씨”

 

▲ 장석철 회장이 망향제단을 바라보며 조상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 있다.

본향 그리워 망향제단 설치, 조상에 대한 도리 다한 듯 기뻐

성사동 인동 장씨는 황해도에 여전히 인동 장씨의 후손들이 살고 있지만 6·25 이후 국토가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교류를 할 수 없게 된다.

조상에 대한 성묘조차 할 수 없게 되자 인동 장씨 사직공파는 1985년 10월 3일 마을 뒷산에 망향제단을 설치하고 조상에 대한 은혜를 기리고 고향 땅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다. 종중의 어른들은 그 동안 고양 땅에 정착 한 조상들의 시제를 꼬박꼬박 올리고 있었지만 그 선조들인 황해도에 있는 조상에 대한 성묘를 할 수 없어 마음 아파하며 지내왔다.

이렇게 세워진 망향제단에는 5세조 장효문, 6세조 장인걸, 7세조 장욱, 8세조 장희한의 신위를 모셨다. 또 망향제단 아래에는 9세조 장흥주, 10세조 장세강, 11세조 장찬현의 비를 세우고 조상의 얼을 기리고 있다.

망향제단의 제막식에는 전국의 인동 장씨들이 모두 모여 성대하게 치러졌다. 장석철 회장은 “어른들도 이제야 조상에 대한 도리를 다 한 것 같다며 흐뭇해했다. 어른들은 늘 살아생전에 황해도에 가보고 싶다고 말해왔다. 나도 지금이라도 갈 수 만 있다면 당장 황해도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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