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의 교통안전칼럼
[고양신문] 지난 8월 24일, 남산 둘레길에서 순환 버스가 빗길에 미끄러져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목격자의 첫 반응은 놀랍게도 도로 자체에 대한 우려였다. “사고가 난 걸 보자마자 페인트 때문에 결국 버스가 넘어갔구나 하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미끄럼 방지를 위해 깔아놓은 빨간 도료가 오히려 사고의 원인이 됐다는 지적이다. 같은 노선을 운행하던 다른 버스 기사는 "(그 도로는) 한 50m까지 브레이크가 안 듣는다. 사람 죽으라는 것"이라며 "도로에 페인트를 바르지 말라고 민원을 많이 넣었다"고 토로했다.
서울 국립극장부터 이어지는 남산 둘레길은 운전자들에게 명소로 꼽히는 코스지만, 다른 도로들보다 사고 위험이 커 악명 높은 곳이기도 하다. 경사가 최고 15.3도에 달하고, 일방통행인 1차로와 인도가 구분 없이 붙어 있다. 폭은 1.2~2.1m밖에 되지 않는다. 미끄럼 방지를 위해 빨간 도료로 바닥을 코팅했는데 이게 더 문제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2022년부터 최근까지 남산 둘레길에서는 중대 사고가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지난 5월에는 20대 남성이 오후 11시쯤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내려오던 중 자동차를 피하려다 자전거에서 튕겨 나가 목숨을 잃었다. 작년 8월에는 30대 남성이 오후 10시쯤 자전거를 타고 남산 둘레길 내리막에서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마주 오는 차량과 정면충돌했다. 2022년에도 자전거를 타던 한 남성이 이 길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는데, 경찰이 당시 자전거에 부착돼 있던 속도계를 확인한 결과 시속 20km로 달리던 자전거가 시속 40~50km로 갑자기 속력이 붙으면서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의 핵심은 명확하다. 미끄럼 방지를 목적으로 시공한 빨간 도료가 특히 빗길에서 오히려 미끄러움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가파른 경사에서 제동력을 잃은 차량과 자전거는 통제 불능 상태가 된다. 안전을 위해 칠한 페인트가 되레 사고를 부르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운전자와 자전거 이용자들이 반복적으로 민원을 제기했음에도 개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버스 기사들은 이 도로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고 페인트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사고가 계속 발생할 때까지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2022년부터 최근까지 최소 4건의 사고가 발생하고 나서야 이 문제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남산 둘레길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국의 급경사 도로, 학교 앞, 횡단보도 주변에 칠해진 컬러 도료들도 비슷한 위험을 안고 있을 수 있다. 도로 표면에 칠하는 페인트는 시간이 지나면서 마모되고 매끄러워진다. 특히 비가 오면 물과 섞이면서 미끄러움이 더욱 심해질 수 있다.
우리가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첫째, 컬러 도료가 깔린 구간, 특히 내리막길에서는 평소보다 속도를 더욱 줄여야 한다. 비 오는 날에는 더욱 주의가 필요하다. 둘째, 자주 다니는 도로에서 페인트가 반질반질하게 닳았거나 빗길에 유난히 미끄러운 곳을 발견하면 지자체에 신고해야 한다. 셋째, 도로 관리 당국은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운전자들의 반복적인 민원은 단순한 불편 호소가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 신호다.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 안전을 위한 시설이 오히려 위험을 만들어내는 모순을 더는 방치해서는 안 된다. 좋은 의도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신속하게 대응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우리가 매일 밟고 지나가는 그 도로가, 누군가에겐 생사의 갈림길이 될 수 있다.
이광수 일산서부경찰서 경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