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비슷한 거 하는 M세대의 글쓰기
[고양신문] 병오년이 밝은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는데, 다들 길한 새해 맞이하고 계십니까? 저는 새해 첫날부터 길조(吉鳥)를 보았습니다. 아침부터 층간 소음을 피해 부지런히 카페로 종종걸음을 치는데 배가 빨간 새 한 마리가 저보다도 빠른 속도로 가로수로 날아들었습니다. 나무를 똑똑똑 쪼는 것을 보니 딱따구리 같습니다. 배만 빨간 게 아니라 뒷머리도 빨갛고 등에는 근사한 줄무늬도 있습니다. 뭐 저리 예쁜 게 다 있나, 하며 홀린 듯 보고 있으니 사람들이 왜 새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마치 날아다니는 꽃 같습니다. 꽃이 날갯짓을 하고 나무 사이를 팔랑거리다 똑똑똑 쪼기까지 하니 흡사 동화 속에 와 있는 기분입니다.
새 이름이 궁금해 ‘배가 빨간 딱따구리’로 검색을 해보니 ‘붉은배 오색 딱따구리’에 관한 기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내용이 심상치 않습니다. ‘지구상에서 몇 마리 남지 않은 새’, ‘살아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보도되기는 처음’(붉은배 오색 딱따구리’ 처음 찍혔다, 2026년 경향신문 기사). 더 알아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적당히 모르고 있으면 지구상에서 몇 마리 남지 않은 ‘붉은배 오색 딱따구리’를 본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초부터 그런 귀한 새를 본 사람은 분명 운이 좋을 겁니다. 마침 몇 달간 책상 앞에 붙박혀 쓴 원고를 막 출판사로 보냈으니 이 운 좋은 사람에겐 틀림없이 즐거운 소식이 들려올 겁니다.
그러나 글을 오래 붙잡고 있으면 쓰는 손보다 보는 눈이 먼저 뜨이게 됩니다. 그렇게 개안(開眼)한 눈으로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은 자기 문장의 변변찮음입니다. 다른 작가들의 글은 너무도 쉽게 읽히는데, 제 글은 한 문장도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습니다. 구성은 터무니없고 논리는 빈약합니다. 어설픈 기교는 없느니만 못합니다. 열심히 퇴고해 보지만 고쳐도 끝이 없고 쓸수록 부끄러워집니다. 공모전 마감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 원고를 보내기가 망설여집니다. 더는 쓸 체력도 없는데 한 달 후에 있는 다른 공모전으로 미룰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달만 더 쓴다면, 밤마다 뛰는 윗집 아이도 딱 한 달만 묶어둔다면, 승산이 보일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불만족한 마음을 어금니 아래로 짓씹으며 보내기 버튼을 눌렀습니다. 한 달 후에도 분명 또 한 달을 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이란 놈은 쓰면 쓸수록 자신이 못 쓴다는 사실만 예리하게 자각하게 하므로 진정한 의미의 탈고는 불가능한 개념 같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이 불만족스러운 글쓰기를 놓지 못할까. 그 불만족이 주는 쾌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잘하기 위해 12시간씩 책상 앞에 앉아 잔뜩 성난 시선으로 화면을 노려보고, 다래끼약을 먹고, 코피를 닦고, 다시 화면을 노려보고 있노라면 마치 열여덟 살 그때로 돌아간 기분입니다. 60만 수험생의 목표인 서울대를 향해 두세 시간만 자며 매진하던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체력도, 집중력도 형편없습니다. 이젠 삼시세끼 밥도 스스로 차려내야 하고 생계까지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나이에도 무언가를 잘 해내고 싶은 게 있다는 것이 주는 특별한 기쁨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열여덟의 제가 원했던 건 실상 부모님과 세상의 욕망이지만, 마흔의 제가 원하는 건 오롯이 제 욕망입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무언가를 잘 해내려 분투하다 보면, 이미 무언가를 아주 잘하는 사람들의 성취를 전혀 다른 깊이로 감각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조성진의 쇼팽 콩쿨 연주를 듣다가, 김연아 선수의 올림픽 경기 장면을 보다가 왈칵 눈물을 쏟은 겁니다. 이미 수없이 보고 들은 장면인데도 이제야 그들이 구현하는 아름다움의 감동이 온몸으로 실감됩니다. 제 안의 미(美)를 감각하는 기관이 열렸나 봅니다. 또 다른 개안입니다.
그러면 저도 세상에 아름다움을 늘리는 데 기여하겠다며 다시 책상 앞에 앉습니다. 또 글을 고칩니다. 이 모든 과정이 열여덟의 저보다 현재의 저를 더 고양시킵니다. 그 고양감이 이 불만족스러운 글쓰기를 계속 이어가게 하는 힘일 겁니다. 참으로 고약하고 즐거운 글쓰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