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빛시론]
[고양신문] 작년까지 주민자치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고양으로 이사 온 지 몇 년이 흘렀는데도 동네에 친한 이웃이 없다는 게 아쉬웠는데, 주민자치회 위원을 모집한다는 거리 현수막에서 '추첨'으로 위원을 뽑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추첨이라면 지역 활동 경험이 없는 나도 될 수 있겠다는 기대로 신청했다.
주민자치회 덕분에 동네 사람들을 알게 됐다. 밤늦게 집 앞에서 술 한잔하는 이웃이 생겼으니 애초 바람은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고양시장에게 위촉장을 받은 '자치' 위원이 아닌가. 법률과 조례는 주민자치회의 목적을 '풀뿌리자치 활성화'로 명시한다. 내가 사는 동에서 마을자치를 구현하라는 의미이다. 처음에는 잘 알지 못한 채 들어왔지만, 주민자치회는 내가 생각한 이상의 무게를 지닌 조직이었다.
주민자치회 활동을 하면서 늘 의문이 들었다. 정말 우리가 풀뿌리자치를 하고 있는 걸까. 현재 주민자치회의 활동은 사업단체 모델에 가깝다. 마을 전체의 발전을 논의하는 주민대표조직으로서 자리잡고 있지 못하다. 법률과 조례가 주민자치회에 상당한 역할과 권한을 부여하고 예산까지 지원하는 취지가 퇴색한다.
요즘 거리마다 안내 현수막이 걸린 주민총회를 보자. 주민총회는 주민자치회의 가장 중요한 행사로서 지역주민들이 모여 마을 의제를 논의하는 자리이다. 조례에 따르면 주민총회는 주민자치회 활동 평가, 동 행정사무에 대한 의견 제시, 다음 연도 자치계획안, 주민참여예산 등 마을의 중요 의제를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민총회는 안건이 '다음 연도 자치계획안'에 한정된다. 게다가 이 자치계획안마저 마을발전을 위한 종합계획이라기보다 고양시 보조금으로 진행할 몇 개 개별사업에 그친다. 결국 법과 조례는 주민자치회에 풀뿌리자치를 구현하는 주민대표조직의 위상을 부여하지만, 실제로는 몇 개 보조금 사업을 벌이는 '사업단체'에 머문다.
어떻게 하면 주민자치회가 사업단체 단계를 넘어 주민대표 기구로 성장할 수 있을까. 많은 주민과 지역단체가 함께 모여 토론하고 활동하는 '주민대표 플랫폼'이 될 수 있을까.
마침 기회가 왔다. 올해 3월 지방자치법이 개정돼 주민자치회의 법적 위상이 명확해졌다. 시범사업으로 운영되던 주민자치회가 이제 본사업 조직으로 격상됐다. 6월에는 지방자치법 개정 취지를 살려, 행정안전부가 주민자치회의 역할과 권한을 대폭 강화한 참고조례를 발표했다.
참고조례는 주민자치회가 사업단체를 넘어 주민대표 조직으로 활동하도록 역할과 권한을 강화한다. 예를 들어 주민자치회는 동 지역발전계획, 환경기초시설 설치 등에 관해 동과 협의하는 권한을 갖고, 지역의 작은도서관, 공원, 공중화장실, 공용주차장 관리 업무를 수탁받을 수 있다. 이 수탁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비영리법인이나 협동조합을 지역주민과 함께 설립할 수도 있다.
또한 주민자치회는 지역 기관이나 단체와 협력해 돌봄, 마을환경, 안전 등 마을공동체 활동을 수행하고, 주민참여예산위원회, 지역사회보장협의체, 도시재생주민협의체 등 주민참여기구를 대체하거나 연계해 활동할 수 있다. 나아가 참고조례는 주민총회 안건으로 ‘주민자치회 운영세칙 제개정 내용의 보고 및 시행’을 추가했다. 주민자치회가 '자치위원들의 단체'를 넘어 주민 전체를 대표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개정 항목이다.
참고조례 내용이 혁신적인 만큼 지역사회에서 실제로 구현하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주민자치가 풀뿌리자치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걸어가야 할 길이다. 예전에 동 자문기구였던 주민자치위원회가 1세대, 현재의 사업단체 단계가 2세대라면, 이제는 지역 '주민대표 플랫폼'이라는 3세대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그만큼 혁신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참고조례를 반영하는 고양시 조례 개정이 고양시와 시의회에서 문구 몇 개 바꾸는 작업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주민자치회, 지역단체, 고양시, 시의회 등이 함께 주관해 주민자치 대전환을 위한 동별 주민토론부터 시작하자. 주민들이 직간접적으로 주민자치회 활동을 접해왔기에 지역공동체를 향한 열띤 이야기가 쏟아 나올 것이다. 풀뿌리자치를 향한 열기를 아래로부터 모아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