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호의 BOOK회귀선(18)
-민인선 주엽어린이도서관 사서


책에 흥미 느끼도록 돕는게 사서 역할
계절에 어울리는책 추천 좋아해

수많은 책 가운데 선택된 한권
나만의 취향 생기는 경험 누려보길

독서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어
책과 늘 함께 하고 싶은 이유죠

민인선 주엽어린이도서관 사서
민인선 주엽어린이도서관 사서

[고양신문] 가을입니다. 책을 읽기 좋은 계절. 하지만 책이 꼭 어느 계절에만 읽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쁜 하루를 마치고 펼치기도 하고, 한동안 잊고 지내다 문득 다시 찾기도 합니다. 어떤 책은 읽는 순간 마음에 남고, 어떤 책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렇게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우리는 이름 없는 어느 계절에 들어섭니다.

책을 좋아하는 독자의 일상과 삶을 만나 온 'book회귀선'도 조금씩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간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좋아하는 책을 묻는 일이 결국 그 사람의 관심사와 살아온 시간을 상냥하게 톺아보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종착역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니 오히려 어린 시절 처음 만난 책의 기억이 선명해집니다. 이번에는 매일 책과 사람을 만나는 고양시립주엽어린이도서관 민인선 사서를 만나 한 권의 책이 어떻게 사람에게 스며드는지 물어보려 합니다.

도서관에는 저마다의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이 찾아옵니다. 어린이도서관에서 매일 책과 사람을 만나는 사서에게 책은 어떤 의미일지, 다른 사람에게 책을 권하는 일과 나를 위해 책을 읽는 일은 어떻게 다른지, 책과 함께 살아가는 여느 이웃주민의 이야기를 들여다 봅니다.
 

❚어릴 적 처음 책과 가까워졌던 순간이나 지금도 문득 떠오르는 책이 있나요?

제가 어릴 적에는 가정집마다 위인 전집, 어린이 세계문학 전집들을 장만하던 시절이었고 저희 집도 마찬가지였어요. 저희 어머니는 서울로 상경해 돈을 처음 벌기 시작했을 때 월세만 빼고 전부 책값으로 탕진할 정도로 책을 좋아하셨고 덕분에 함께 자취하는 이모들한테 눈칫밥을 많이 먹었다 했습니다. 그렇게 이후에도 엄마는 여전히 책을 자주 구입하셨고 그 책을 제가 읽었으며, 그렇게 제 최초의 독서는 자연스레 세계문학으로 시작됐습니다.

보물섬, 비밀의 화원, 제인 에어, 메리 포핀스를 좋아했습니다. 저는 책을 먼저 찾아 읽는 아이는 아니었어요. 집에서 TV를 못 보게 하니 버티고 버티다 정말 심심해서 책등을 만지거나, 책 제목 읽기로 놀며 점점 재미를 붙여 책을 스스로 펼치게 된 아이였습니다. 모든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재밌거나 흥미진진 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어린 내가 이렇게나 두꺼운 책을 읽고 있다는 귀여운 허영심도 있었을 거고, 엄마한테 오늘은 내가 무얼 읽었다며 자랑하려는 우쭐한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앞서 말한 책 제목들과 풍경들이 이제는 저를 어린 시절 나른한 오후의 방으로 소환시키는 소중한 기억이 됐습니다.

❚ 사서라는 직업을 선택한 뒤, 책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22살에 첫 배낭여행을 떠났다가 우연히 로맹 가리, 오르한 파묵의 책을 알게 되고 그 이후부터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빌렸습니다. 주로 작가 이름 근처에 있는 책부터 빌려 봤어요. 예를 들어 로맹 가리의 책을 찾아가면, 근처에 비치된 프랑스 혹은 동유럽 작가의 책을 찾아보는 식으로. 그렇게 로맹 가리에서 프란츠 카프카, 아멜리 노통브 같은 작가들의 책도 만나게 되었어요.

새로운 작가를 찾듯 직업도 그렇게 찾아낸 것 같습니다. ‘그래! 세상의 돈 버는 일은 다 힘들다고 하던데, 이왕 내가 좋아하는 책 근처라면 조금은 더 낫지 않겠어?’ 하고요. 그렇게 도서관 사서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독자였을 때는 과감하게 나의 취향 위주로만 독서했어요. 때로는 난해한 책도 보다가 웹소설도 웹툰도 즐겨보고요.

사서가 되고 나서는 독자들의 최신 트랜드가 궁금해졌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책을 많이 찾나, 어떤 작가에 반응하나 궁금해졌어요. 그렇게 연차가 쌓일수록 자연스레 책소개와 책표지, 목차를 엄청난 속도로 훑어보게 되는 요령도 생겼습니다.

❚ 도서관에서 일하며 만난 사람들 가운데 유독 기억에 남는 이용자나 장면이 있나요?

현재 근무하고 있는 주엽어린이도서관에 오는 이용자들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아요. 도서관 구석구석 잘도 숨어 책을 읽는 손님, 바닥에 누워서 집중하고 있는 손님, 도서관 마감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한 줄 이라도 더 읽으려고 걸어 나가면서 읽는 손님, 가기 싫다고 양육자의 손을 잡고 우는 손님, 쉼터에서 친구들과 놀기도 하고 때로 숙제도 하는 손님, 그리고 도서관에서 친구가 되어 다음에 또 만나 서로 인사하는 손님들까지. 책에 집중하는 어린 손님들의 모습과 정겹고 살가운 풍경들을 자주 마주하다 보니 소위 인류애가 충전되는 느낌입니다. 저는 지금도 이런 다정한 기분을 매번 느끼며 어린이도서관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민인선 주엽어린이도서관 사서
민인선 주엽어린이도서관 사서가 어린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어린이에게 책을 권할 때 특별히 고려하는 부분이 있나요?

제가 재밌게 읽은 책과 그 계절에 어울리는 책을 어린이에게 추천하는 걸 좋아합니다. 어쩌면 어떤 책을 추천할지보다, 아이들이 책 자체에 흥미를 느끼도록 돕는 게 제가 앞으로 고민해야 할 영역인 것 같아요. 책이 있는 공간이 아이들에게 편안하게 느껴져야 할테고,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재밌어야 아이들이 다음에 심심할 때 또 올 수 있을테니까요. 아이들은 도서관에서 제가끔 따로 또 같이 놀다가, 다 놀고 나서 심심하면 책을 한 번씩 만져 보거나 자연스레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그랬듯이. 그렇게 어린이들이 스스로 책도 선택해 보고 자신만의 책 취향도 생기는 경험을 도서관에서 마음껏 누리길 바랍니다.

❚ 책은 어린이와 어른 사이에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그림책을 읽다 보면 내 안의 어린아이를 발견하게 돼요. 그래서 어린이를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동시에 그 당시 어린 나에게는 어떤 어른이 필요할까 질문하게 돼요. 내가 어릴 때 이 도서관 주변에서 마주치면 좋을 법한 어른 한 명을 떠올리며 그 모습을 기준으로 삼고 일하게 됩니다.

특히 가족이 도서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순간들은 그 자체로 이미 어린이도서관의 시작이자 완성 같은 모습이 됩니다. 기승전결이 없어도 이 자체로 소중한 이야기이자 풍경이라 생각해요. 먼 훗날 나이가 들어 삶을 돌아봤을 때에도 자주 생각이 날 것 같은 장면입니다. ‘아, 그때 우리 아이와 도서관에 자주 갔었지. 아이가 어떤 책을 많이 좋아했었지.’ 하고요. 동시에 어느 아이는 ‘그래, 우리 아빠 혹은 우리 엄마와 이 도서관에 자주 왔었지, 그때 그 책을 함께 읽었지’를 떠올리게 될 겁니다.

❚ 바쁜 일상속에서 책 읽는 시간은 어떻게 만들어 가시나요?

그림책의 경우 신착도서 위주로 빠르게 살펴봅니다. 지나가면서 눈에 띄는 그림책 역시 몇 권씩 뽑아 간헐적으로 보기도 하고. 정말 인기가 많은 책은 대출과 예약이 많아 읽기 힘든 경우가 많은데 정 궁금하면 서점에서 나에게 투자를 한다 생각하고 구입하기도 합니다. 

그림책 외에 일반도서의 경우는 주말에 카페 나들이를 가서 읽거나, 여행지에서 가까운 동네책방에서 구입한 후 읽습니다. 여행지에서 선택한 책은 저에게 꼭 맞는 책이 아닌 경우가 많았지만, 그럴 때는 여행 자체가 주는 신선함이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동력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 책을 읽으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이전과는 다르게 바라보게 된 경험이 있나요?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따뜻한 가정에서 자라던 소년 싱클레어는 신비로운 소년 데미안을 만나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통해 선과 악을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데미안과의 우정을 바탕으로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를 깨고 참된 자신을 발견해가는 과정이 인상 깊었습니다.

아! 내가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이 전부가 아니구나. 나는 언제든 틀릴 수 있고, 잘못 생각할 수도 있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꼭 악인이 되거나 인생이 망하는 것은 아니구나. 나도 타인도 마찬가지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그 후로 스스로와 타인을 너무 엄격하게 판단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생각과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사람을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 앞으로도 책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서로서 앞으로 어린이들이 책을 만나는 공간이 어떤 곳이 되기를 바라시는지도 궁금합니다.
  
독서도 도서관도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읽다보면 잘 이해가지 않는 책도 꽤 많을 겁니다. 특히 어린이뿐만 아니라 책을 막 접하기 시작한 모든 어른들도 말이죠. 책은 다 알지 못해도, 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생각하며 겅중겅중 읽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독서는 결국 오독의 향연일 겁니다. 많이 이해 못하면 어떤가요. 내 상황에서 내 마음에서 이해하는 만큼 받으면 되는 것이 독서라 생각하면 책이 좀 가깝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오독의 연속 아닐까요? 다 이해할 수도 없고 때때로 오독하는 이 모든 행위가 마치 인간이 삶을 대하는 모습과 비슷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삶의 겸손함을 잊지 않게 해주다니, 이게 이렇게 즐겁다니, 이 모든 게 제가 앞으로 책과 함께 하고 싶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지금 제가 일하고 있는 어린이도서관이, 수 만권의 책 중에 어린 나의 탐색과 선택으로 한 권의 책을 대출해 가는 짜릿함이 살아 움직이는 도서관이 되길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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