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PEOPLE_인터뷰_ 변장호 고양시영화협회 회장

 

<감자, 1987년>
1925년 《조선문단》 1월호에 발표됐던 김동인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강수연, 이대근, 김인문, 김형자가 출연했다. 복녀의 비극적인 운명을 통해 민족의 수난과 민족적 운명의 자각을 꾀했다. 비탄과 좌절 속에서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정조를 내던져야 했던 서민 여성들의 몸부림을 비극적으로 그렸다. 양반집 딸로 태어난 복녀가 가난 때문에 80원에 팔린다. 여인이 절박한 상황 속에서 모멸감으로 몸부림치다가 죽은 후에 또 다시 80원에 팔려가는 설정에서 복녀의 시신 앞에서 왕서방과 한의사, 그녀의 늙은 남편이 돈을 주고받는 흥정 묘사로 비인간적인 인간의 도덕적 결핍을 꼬집었다

 <태양은 내것이다>(1967년)로 데뷔한 변장호 고양시영화협회 회장의 영화스타일은 당시 관객의 취향과 맞아떨어졌다. 1980년에 제작한 <미워도 다시한번 80>은 그 해 발표된 작품 중 흥행 1위를 차지한 영화로 기록됐다. 변 회장은 액션과 멜로장르로 흥행감독으로서 인기와 부를 얻었고, 문예물을 토속적인 연출 스타일로 각색하여 작품성을 인정받아 국내·외 각종 영화제를 휩쓸며 흥행성과 작품성을 모두 인정받으며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한국영화의 중흥기이자 황금기에 명장이었다.
MBC 인기 연속극을 영화화한 첫 작품 <태양은 내것이다>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1969년에 두 번째 작품인 <정과 애>, <창> 등이 흥행에 성공했다. <창>은 당시 대담한 기획이었다. 주제는 유부녀의 이유 없는 반항으로 1960년대 부유하지만 외로운 유부녀가 남편이 소홀한 상황에서 젊은 남자와의 외도를 정당화시켰다. 1960년대 여성상의 변화를 날카롭게 읽어낸 소재는 영화감독으로서의 인기를 누리게 했다.
이후 ‘눈물의 웨딩드레스’(1973년)가 서울 개봉관에서 22만명 관객을 동원하면서 크게 성공하며 대중성이 뛰어난 감독으로 인정받았다. 70년대에는 매해마다 거의 4~5편에 달하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며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한국 영화계를 풍미한 거장인 변 회장을 충무로에서 만나 그의 영화 한 길 발자취를 뒤돌아보았다.

▼재능은 열심히 하는 과정에서 비롯된다며 순수한 열정을 강조하는 변장호 고양시영화협회장은 지난해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등록되는 영예를 안았다. 변 회장은 2006년 보관문화훈장을 비롯해 199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대상,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감자, 1988년),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감독상(보통여자, 1997년),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감독상(홍살문, 1973년),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여자가 화장을 지울 때, 1970년) 등을 수상했다. 변 회장은 고양의 자랑스런 문화예술인이자 대한민국 영화계의 빛나는 별이다.

영화감독으로서 변장호를 소개하면

1939년 경기도 이천군에서 출생했다. 한양대학교 자원공학과를 졸업했지만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 많은 고민을 했다. 대학 4학년 무렵 진로에 대해 생각하던 중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에서 모집한 조감독 공채시험 공고가 눈에 들어와 지원했다. 영화가 미래산업으로 전망이 밝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채용방식은 15명 인턴사원을 모집한 후 6개월 뒤 정식사원 3명을 뽑는데, 200여명이 몰렸다. 합격 후 감독 수업을 받으며 영화감독의 꿈을 키워나갔다. 정작 6개월 뒤엔 3명만이 남았다. 그만큼 당시 영화 제작 현장은 치열했다.
사실 나는 잡기가 부족해서 다양한 상황을 연출하는 일이 녹록치 않아 방황하던 시기에 한 선배가 조언하기를 “영화계에 대졸자가 전무하니, 네가 열심히 한다면,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질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2년 후 감독의 기회가 찾아왔다. 1967년 태현실과 이대엽이 주연을 맡은 코믹한 멜로드라마 <태양은 내것이다>로 데뷔했다. 성적은 좋지 않았다. 이듬해 두 번째 작품<정과 애>, <창> 등이 흥행에 성공한 후 본격적인 영화감독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후 <비 내리는 명동거리>, <명동의 왕과 박>, <명동삼국지> 등 일련의 명동을 배경으로 한 액션영화를 잇달아 내놓고 감독으로서 성공가도를 달렸다. 제작 영화가 모두 70여편되는데 대부분 흥행에 성공했다.
이러한 흥행감각은 영화 입문 초기부터 산업으로서 영화를 이해한 나름의 혜안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한다. 동 시대 관객과의 소통을 최우선의 창작관으로 삼았던 것 같다.
32세 되던 해 ‘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장으로 추대됐다. 3회 연임을 했고 40세에는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직을 수행했다. 1987년부터는 한양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퇴직 후, 동덕여자대학교 방송연예과 초빙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는 50년된 영화기획사 ‘대종필름’의 대표이며 대한민국예술원 연극·영화·무용 부문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초기 작품의 장르는 주로 액션물이었는데, <홍살문> (1972년) 이후 멜로물 위주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가
감독은 다양한 작품 속에서 주인공의 감정선을 세밀히 묘사하기 위해선 감수성이 뛰어나야 하는데, 난 이점이 부족했다. 내 작품의 러브신은 무엇인가 어색했다. 그래서 집중한 장르가 ‘액션’이었다. 그런데 출자한 <이 생명 다시 한번> (1972년)이 검열에 걸렸다. 당시 검열에 걸리면 투자된 자금은 회수가 거의 불가능했다. 비장한 각오로 문화관광부의 담당 과장과  협상을 시도했다. 특별 자막을 제작해 재편집하는 조건으로 상영 승인을 받았다.
이외에 아주 특별한 ‘조건’이 있었다.  통속 액션, 폭력 장르보다 작품성이 강조된 작품 제작에 대한 약속이행이었다. 이 계기를 기점으로 말 그대로 ‘좋은 영화’표의 기획을 하였다. 이 시기에 탄생한 작품이 <홍살문>이었는데 국내 영화제의 수상을 독식하고 내게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감독상을 안겨줬다.
또 다른 계기는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이다. 1970년대 영화 관객의 대부분은 60년대와 마찬가지로 여성이 대부분이었다. 70년대 들어서며 텔레비전 수상기의 보급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주된 영화관객인 여성들이 안방극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 관객을 동원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성 취향의 멜로장르에 주목했다.

당시에 추구한 작품 스타일은 ‘한국의 여성상’이었다. 작품배경이 과거, 현재를 막론하고 모두 여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국 여성상의 변천을 묘사했다. 신분이 열녀(홍살문)이건 매춘부(O양의 아파트, 눈물의 웨딩드레스)이건 작품 성격이 멜로물이든 문예물이든 구분 짓지 않고 여성의 모습을 통해 당시 한국사회를 통찰해 내려 했다.
전반적으로 80년대 영화계에 에로티시즘의 농도가 점점 짙어지는 경향을 보인 것은 당시 표현의 제약이 완화되었고 70년대 유신체제의 사전 검열로 인해 억눌려 왔던 표현 욕구를 강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여기에 TV 드라마에 대항하기 위해 에로티시즘은 당시 영화적 유행이기도 했다.

영화협회와 정기적인 활동은
2000년 황교선 고양시장으로부터 고양예총에 영화협회의 설립을 의뢰받았다. 관련 시의원과 영화인들 100여명이 모여 협회를 결성했다.
활동은 단편영화제로 시작하였다. 그 후 시나리오 공모전, 5일간 호수공원에서 한국영화 결작선 상영회, 작년까지 제11회 고양대학청소년국제영화제를 개최했다. 이 행사는 대학 간의 경합방식 의 영화제로 연간 300여편의 작품이 경쟁한다.

임기 내 목표가 있다면
차기 영화협회장을 찾고 있다. 작년에 협회 내부와 지역 영화인을 중심으로 신청을 받았다. 당시 선출의사를 밝히는 이가 없어 연임 중이지만 빠른 기일 내에 이임할 예정이다.
고양에는 약 200여명의 많은 수의 영화인이 거주하고 있다. 하루 빨리 적임자를 선임하여 고양시 영화협회가 보다 활성화되도록 디딤돌 역할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회장직을 수행하며 주된 활동 지역이 충무로였던 관계로 지역에서 보다 적극적인 활동에 제약이 있어 타 협회만큼 내부 결속력을 다지지 못했던 점이 아쉽기도 하다.

브로맥스와 한국 영화계의 진일보를 위해 조언한다면
산업기반 시설이 부족한 고양시에 방송영상산업 단지가 조성된다는 소식에 기뻤다. 하지만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는 현 상황에 안타깝지만 국내 부동산 경기가 안정화 되면 다시 활기를 띌 것으로 전망한다. 우선 현재 입주한 기업과의 보다 원활한 소통으로 부족한 점은 보완해 주어 입주 기업들의 만족도를 높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의 영화제작 환경은 감독 중심으로 제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현재의 영화정책은 거대자본의 배급사 중심으로 되어있다. 영화 지원금은 영화진흥공사 내부의 몇 명이 결정하고 책임소재와 투명성이 부족하다.
한국 영화 관람객이 천만인 시대다. 이는 영화제작 장르가 다양화되지 않은 쏠림현상의 단면이기도 하다. 감독이 영화를 기획해도 투자사는 일부만 지원하고 대부분은 배급사가 지원하는 구조로 캐스팅 권한도 배급사에 있다. 흥행을 담보로 스타의 스케줄을 기다리다 기획된 작품이 취소되는 경우도 다반사다.
영화 제작구조는 영화진흥위원회가  영화금고, 영화제작 센터, 배급공사를 총괄하는 방향으로 개선되야 한다. 영화감독은 영화금고에서 대출하고 영화제작 센터는 간접 지원해 배급공사를 통해 전국 배급하는 형태가 적절하다. 수익배분은 영화금고, 제작센터, 감독 순서로 배분되게 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시급히 영화진흥법을 수정 보완하여 다양한 장르와 소재의 영화가 제작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곧 영화 발전의 첩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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