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곤의 손에잡히는책(10)
『담배는 숭고하다』
위험 동반하는 상상력, 휴식, 위로
효율로 짜인 일상에 쉼표를 찍고,
시간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담배
흡연 악마화한 '건강 이데올로기'
'혐연권' 이름의 권리로까지 격상
생존에 급급해 '삶'을 포기할건가
[고양신문] `이 책의 제목으로 쓰인 『담배는 숭고하다』라는 말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어처구니없는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담배를 만인의 적으로 부르는 마당에 ‘숭고’라는 말까지 써가며 담배를 칭송하다니, 반사회적이라고 생각할 법하다. 물론 나는 담배를 피운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면 이따위 책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폐암의 최대 주적, 다중의 건강권을 침해한다는 혐오의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꿋꿋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 ‘담배는 숭고하다’고 하니 어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스스로 말하기를, “이런 주제로 글을 쓴다는 것은 바보 천치나 물정 모르는 학자만이 할 일”이라고 자책한다.
내가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우리 출판사에서 낸 로베르트 팔러의 『나쁜 삶의 기술』을 통해서다. ‘담배는 숭고하다’고 하는 책이나 ‘나쁜 삶의 기술’을 알려주는 책이나 피장파장인 것 같다. 그 책에서는 철학자 슬라보이 지젝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술집, 카페인 없는 커피, 무알콜 맥주, 신체 접촉 없는 섹스, 열광 없는 종교 등 말하자면 알맹이 없는 사물이 판치는 이 문화는 총체적인 무-주의(Non-ism) 문화다.”
『나쁜 삶의 기술』에는 이런 선언과 함께 위험의 한가운데에서 살다 사고로 죽은 자동차경주 선수 요헨 린트의 일화가 나온다. 극도로 위험했던 경주를 끝내고 정비창 타이어더미 위에 쓸쓸히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던 린트의 고독. 담배가 가진 위험성, 불결함, 독성은 자동차경주의 위험 속에 온몸을 내던졌던 한 사람의 찬란한 인생을 완성하는 요소다. 그래서 그 책의 저자는 묻는다. 우리는 ‘생존’에 급급한 나머지 ‘사는 이유’를 포기한 것은 아닌가? 『담배는 숭고하다』는 담배를 통해 바로 이런 어리석음을 되돌리려는 시도다. 오히려 ‘삶’을 위해 ‘생존’을 버리겠다고 선언하는 책이다. 나 같은 흡연자에게는 복음처럼 들렸다고 할까.
대로변에는 담배 피울 곳이 거의 없고 음습한 골목이나 찾아들어가야 하는 흡연자들은, 담배를 피울 때마다 수치심과 죄책감을 강요하는 이 사회 문화나 법규에 분노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폐암의 주범이니, 다중의 건강권이니, 건강보험 재정 소모니 하는 말도 사실은 다 헛소리다. 흡연이 건강에 치명적이라는 것은 이미 19세기에 다 밝혀진 사실이었고, 혐연 정서는 담배가 유럽에 전래된 16세기부터 있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줄창 담배를 피워댔고 심지어 널리 권장된 적도 많다. 요컨대 흡연이나 금연은 건강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순전히 ‘문화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폐암 발병 역시 그러하다. 통계는 1990년대 말부터 2020년대까지 한국 성인 흡연률이 66%에서 34%로 급격히 줄었지만, 페암 사망률과 사망자는 전체 암사망률 중 20%에서 36%로 오히려 늘었다고 말해준다. 그 이유로는 물론 진단수의 증가나 기타 원인이 있겠지만, 흡연율 감소가 국민의 폐암 사망률을 줄이는 데 무슨 도움이 되었다는 증거는 없는 것이다.
근대 권력의 변화 양상을 추적한 철학자 미셸 푸코는 과거 권력이 폭력과 억압을 통해 작동했다면, 근현대의 권력은 안전과 보호의 방식으로 작동한다면서, ‘생명관리정치’라는 말을 썼다. 채찍과 사슬을 든 과거의 권력은 이제 흰 가운을 입은 모습으로 등장해 정신은 물론 우리의 신체까지 관리한다는 것이다. 흡연을 악마화하고 혐연을 부추기는 ‘건강 이데올로기’는 그 대표적인 경우다. 아파트 윗집 아랫집 사이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갈등은 건강 숭배가 얼마만큼 우리 정신 깊이 퍼져 있는지를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생선 굽는 연기보다 특별히 더 해로울 것 같지도 않은 실낱같은 담배 연기와 냄새에는 불쾌해하면서도 자동차 매연과 대기 오염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의 태도 말이다. 건강 이데올로기는 현대의 황금알인 의약 산업의 기둥이자 통치 권력의 정당성 주장에서 한 축을 이룸으로써 자본주의와 권력에 복무한다. 그러나 이 이데올로기는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성립된 것이다. 곧 건강을 ‘질병으로부터의 자유’라고 정의한다면, 우리는 오로지 죽음으로써만 건강을 얻을 수 있다는 역설이다. 인간은 고통과 질병을 안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오히려 고통과 질병이야말로 인간의 일부라는 사실 말이다.
건강 이데올로기로 인해 촉발된 혐연 정서는 ‘혐연권’이라는 이름의 권리로까지 격상되었다. 그러나 혐연권은 가난한 소수 시민의 고달픈 노동과 정신적 비참을 달래줄 수 있는 기회마저 앗아가는 ‘중산층 민주주의’에 불과한 권리이다. 이 사회 일부는 여전히 정신적 위안과 신체적 휴식의 시간을 건네주는 담배를 필요로 한다. 담배는 단순한 비난의 대상을 넘어서 이제는 계급적인 코드를 가지게 되었다.
내가 너무 흥분했나보다. 『담배는 숭고하다』로 돌아가자. 이 책은 담배를 주제로 한 문화비평서이자 철학적 에세이이자 사회심리학 책이라 할 수 있다. 책을 읽다가 책 전체를 요약할 만한 한마디를 접하고는 무릎을 탁 쳤다. “담배가 우리 건강에 좋다면 우리는 더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담배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담배의 위험성 ‘때문에’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다. 우리는 초콜릿이 이를 썩게 하고 과도한 칼로리를 가지고 있지만, 이 위험이 동반하는 쾌락 때문에 초콜릿을 먹는다. “인간과 동물을 구분해주는 것은 오직 흡연뿐”이라는 무명인의 말처럼 동물은 초콜릿도 탐하지 않는다. 담배와 초콜릿은 치명적인 위험과 함께 상상력, 휴식, 달콤한 위로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이런 위험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살아가는 가치를 모른 채 그저 ‘생존’하는 존재가 될 것이다. 동물이 그렇듯이.
이 책의 제목은 위험에서 느끼는 기쁨과 심미적 충족감을 ‘숭고미’라고 설명한 칸트 미학이론에서 나온 것이다. ‘숭고미’는 내가 일전의 칼럼에서도 소개했듯이, 절벽 위에 휘몰아치는 폭풍우나 숲속의 정체모를 짐승을 조우했을 때 느끼는 초월적 경외감과 낯선 미적 경험을 일컫는 용어다. 담배는 역하고 고통스러운 경험과 함께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심미적 쾌락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숭고하다.’ 저자는 ‘집중화’와 ‘증기화’라는 단어로 흡연의 경험을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는 담배연기를 폐 깊숙이 빨아들이는 순간 오로지 홀로 존재하는 자아에 집중하며, 연기를 내뿜는 순간 세계와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며 공간의 일체감을 경험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흡연의 가치는 다채롭다. 담배는 시간을 중지시키고 재정의한다. 효율로 짜인 일상의 시간에 쉼표를 찍고, 시간을 나의 것으로 만든다. 담배는 평등하다. 거지도 왕자에게 불을 빌릴 수 있고, 지휘관과 병사가 함께 담배를 나눈다. 담배는 페미니스트의 도구다. ‘팜므 파탈’로 색칠된 오페라 〈카르멘〉의 집시 여주인공이 피우는 담배는 여성 해방과 자유의 징표다. 담배는 병사의 친구다. 병사들은 상관의 억압과 죽음의 불안을 뒤로 하고 참호 안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전우애를 다진다. 담배는 역설이다. 이탈로 스페보의 소설 『제노의 고백』에서는 주인공이 드디어 담배를 끊은 기념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일평생 담배를 끊고 또다시 담배를 피우는데, 부르주아 도덕주의가 강요하는 질서와 논리를 벗어나 인간의 취약함과 불건강과 의지박약을 스스로 구현함으로써 삶의 진실에 도달한다. 담배는 상징이자 기호이다.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등장인물들이 끊임없이 피워대는 담배는 그들의 심리, 메시지를 침묵으로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담배는 기도다. 평범한 일상의 경험에서 벗어나는 초월감, 불과 연기를 통해 느끼는 폐, 호흡, 입의 종합적인 의식을 통해 우리는 숭고미를 경험한다.
이 책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담배가 사회적 금기이자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 이 시대에 우리가 진정으로 잃어버린 것은 자욱한 담배연기가 아니라 우리 존재에 대한 사유와 숭고한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담배를 버리며 인간이 근원적으로 고독하며 필멸의 운명이라는 자각을 함께 버렸는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