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종 기자의 역사문화탐방
⑨ 양주 천보산 회암사지
고려 왕궁 만월대 닮은 좌우대칭형 가람 배치
유교국가에서 불교위상 지키다 순식간에 몰락
고려~조선으로 이어진 불교문화 연속성 방증
고유 가치 조명하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전
[고양신문] 고양의 북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의 마지막 단계인 ‘최종 신청서 제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15년 넘는 노력 끝에 얻어낸 값진 결과다. 그런데 이웃한 도시에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도전하는 야심찬 후보가 또 하나 있다. 양주 회암사지(揚州 檜巖寺址, 사적 제128호)다.
현재 회암사지는 국가유산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에 올라있다. 초기 단독등재를 시도했던 북한산성이 한양도성, 탕춘대성과 손을 잡고서야 진도를 낼 수 있었던 것을 떠올리면, 건물이 사라진 빈 절터 하나로만 세계유산에 근접해 가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역사적 가치와 차별성이 탁월하다는 방증이다. 경기 북부 고려의 흔적을 찾아가는 네 번째 여정, 양주시 동북쪽 천보산 기슭에 자리한 폐사지(廢寺址), 회암사지를 찾아간다.
고려 후기 “동국 제일의 대가람” 칭송
일산동구청에서 회암사지까지는 승용차로 한 시간 남짓이면 도착한다. 회암사지를 둘러보기 전에 절터 아래 양주시립 회암사지박물관을 먼저 관람하자. 입장료(성인 2000원, 초등학생 1000원)를 내고 전시물을 꼼꼼히 구경하고, 야외 정원을 천천히 걸어 올라 회암사지를 알현해야 비로소 텅 빈 폐사지 위에 펼쳐졌던 거대한 사찰의 흥망성쇠를 마음속으로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암사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왕도(王都, 개성과 한양) 인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왕실사찰로서의 위상을 유지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회암사가 언제 창건됐는지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 시기로 미뤄 12세기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회암사가 본격적으로 고려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시기는 14세기 전반이다. 인도 출신의 원나라 고승 지공선사(指空禪師)가 고려를 방문했는데, 천보산의 산세를 보고 “이곳에 사찰을 크게 일으키면 불법이 흥할 것”이라는 예언을 남겼고, 이 뜻을 이어받아 지공의 제자이자 고려의 왕사(王師)였던 나옹화상(懶翁和尙)이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한다. 기록에 의하면 융성했던 시절에는 건물 규모가 총 262칸에 달하고, 3000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 고려 말의 문인 목은 이색은 “웅장하고 아름답고 화려하기가 동국(東國, 우리나라) 제일”이라 칭송하기도 했다.
태조 이성계가 심신 의탁했던 왕실사찰
회암사의 역사가 더욱 화려하게 꽃피운 시절은 의외로 조선왕조가 들어선 이후다. 언뜻 불교국가 고려에서 전성기를 누렸던 불교가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한 조선이 건국되며 한꺼번에 몰락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많은 역사의 증거는 ‘꼭 그런 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회암사다.
비록 정치이데올로기는 유교로 재편됐다 하더라도 백성들의 내면에는 불교적 심성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이는 왕실도 예외가 아니어서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 스스로가 무학대사(無學大師)를 정신적 스승으로 모셨고, 회암사 주지로서 왕실의 안녕을 빌게 했다. 또한 왕위를 내려놓고 상왕 신분이 된 이후에는 친히 회암사에 머물기도 했다. 태조 이후 세종의 둘째형 효령대군이 불심을 닦고 대규모 법회를 연 곳도 바로 회암사다.
회암사지박물관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전시물과 프로그램 수준 상당히 높은 알찬 문화인프라다. 상설전시장으로 들어서면 회암사의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고, 1997년부터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 수습된 다양한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궁궐 지붕에 사용됐던 청기와, 백자로 만든 동자상, 용문 암막새와 봉황문 수막새, 졍교하게 빚은 용두와 토수, 잡상 등 궁궐과 왕실 수준의 격을 갖춘 유물들은 과거 회암사지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실감영상 미디어아트로 구현된 회암사지의 모습도 흥미로운 볼거리다.
곳곳에 남은 유구 살피며 상상의 나래
이제 본격적으로 운동화끈을 고쳐 매고 회암사지로 올라가 보자. 위에서 아래까지 240m, 좌우로 160m, 실제로 걸어보면 회암사지의 규모가 엄청나다. 천보산 아랫자락의 야트막한 경사지에 모두 8단의 석축을 계단식으로 쌓아 70여 개의 건물을 빼곡히 배치했다. 건물은 삼문-불전(보광전)-법당(설법전)-방장(정청)으로 이어진 남북축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뤘다. 지상 위의 건물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질서정연하게 배치된 석축과 계단, 건물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주춧돌, 진신사리탑, 곳곳에 남아있는 당간지주, 괘불대, 엄청난 크기의 수조와 맷돌 등의 유구를 살피다 보면 자연스레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건축사적으로 회암사는 일반적인 사찰보다는 오히려 궁궐 건축 양식에 가깝다고 한다. 완경사의 넓은 산자락을 차지하며 펼쳐진 좌우 대칭형 건물 배치, 입구에서부터 위쪽으로 단이 올라갈수록 건물의 격조가 올라가는 구조는 고려의 왕궁인 개성 만월대와 유사하다. 주요 전각 주변을 회랑으로 둘러싸 내부와 외부를 엄격히 구분한 것도 고려 왕궁 건축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분단으로 가보지 못하는 고려 왕궁의 공간미학을 양주 회암사지에서 대리 감상하는 셈이다.
종교사적으로 회암사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선종(禪宗) 사원이 한국의 건축문화와 결합된 공간이라는 의의를 지닌다. 회암사지가 14세기 동아시아 불교의 교류와 전파를 보여주는 특별한 역사유적이라는 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전 과정에서 국가유산청이 방점을 찍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16세기 어느 날, 기록조차 못 남기고 몰락
이렇게 융성했던 회암사가 왜 흔적을 감춘 것일까. 세월이 흐르며 왕실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던 사찰들도 점차 영향력을 상실해 갔다. 그러던 차에 ‘불교 중흥’을 표방하며 강력한 불사를 추진했던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명종 대에 권력을 장악하고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文定王后)다. 그가 쇠퇴해가는 불교를 다시 일으킬 중심처로 낙점한 곳이 바로 회암사였다. 대대적인 국고가 투입됐고, 수많은 불상과 불화가 제작돼 회암사에 봉안됐다.
하지만 이는 회암사의 마지막 영화로운 불꽃이었다. 불교 중흥을 선언할 대법회를 앞두고 문정왕후가 갑자기 숨을 거두자, 회암사는 순식간에 몰락했다.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일부 학자들은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 정책에 반발했던 유생들이 사찰을 파괴하고 불을 지른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선조 대의 기록에는 “회암사가 불타 터만 남았다”고 적고 있다. 12세기에 창건돼 400여 년 동안 왕조가 교체되는 격랑에도 왕실사찰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지켜왔던 회암사가 한 줄 기록도 남기지 못하고 지상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다만 흙속에 몸을 박고 있던 거대한 화강암 덩이들이 흔적으로 남아 빛나던 시절의 이야기를 먼 후손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천보산 중턱 지공, 나옹, 무학대사 부도·승탑
회암사지를 둘러본 후에는 다리품을 조금 더 팔아 천보산 중턱에 있는, 후대에 세워진 새로운 회암사까지 꼭 방문해 보자. 사찰 뒤편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회암사의 융성했던 역사를 만든 3대 고승인 지공선사 부도, 나옹선사 부도, 무학대사 승탑과 석등을 차례대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도는 고려시대 석물의 조형미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특히 무학대사탑 앞을 지키고 있는 쌍사자석등은 조선 전기 불교미술의 수작으로 평가받아 보물로 지정됐다. 사방을 둘러싼 소나무숲에서 그윽한 숲의 향내가 번진다.
박물관과 회암사지, 천보산 중턱 고승들의 승탑까지 모두 둘러보고 나니, 상상 속의 회암사를 두르고 있던 안개가 조금이나마 걷히는 느낌이다. 개성과 한양의 중간지점인 양주 땅에 회암사라는 크고 화려한 사찰이 있었다. 단절된 듯 보이는 두 왕조, 고려와 조선이 역사·문화적 연속선상에서 맥락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회암사가 방증하고 있다.
문화예술도시 고양? 자부심과 현실의 간극
차를 타고 돌아오며 내내 ‘양주시가 부럽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인구 30만 명의 양주시는 이날 둘러본 회암사지박물관을 비롯해 현대미술의 거장을 조명한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민복진미술관, 애국지사를 기리는 조소앙기념관 등을 지자체가 직접 운영하고 있다.
반면 고양시는 어떤가. 인구 107만 특례시, 어느 도시 부럽잖은 깊고 풍부한 역사유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시립으로 운영되는, 규모와 위상을 갖춘 역사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의 인프라가 사실상 전무하다. 문화예술도시라는 자부심과 초라한 현실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