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비슷한 거 하는 M세대의 글쓰기]
[고양신문] 황정은 작가의 칼럼 ‘씨앗 형태로 미래를 그리는 노력, 낭만이 난만하기를’(<시사인> 2026. 8. 2)을 읽다가 “삶이란 그냥 ‘몸’이 아닐까”라는 문장을 오래 붙들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것을 이루든 인간은 몸이 전부이고, 그 몸이 부서지는 순간 우리의 세계도 전부 끝난다는 진리가 사뭇 와닿았습니다. 작가는 그것이 우리가 읽고 쓰는 이유라고 했습니다. 읽고 쓴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몸의 한계, 즉 필멸을 초과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론 공감했고, 한편으론 고개가 갸웃해졌습니다.
완전히 수긍하지 못한 이유는 저는 한 번도 몸의 한계를 초과하기 위해, 그러니까 제 글을 오래도록 남기기 위해 써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일상에서 경험한 어떤 사건이 있었고, 그것이 제게 강한 인상과 직관을 남겼기에 그 의미를 알고자 썼을 뿐입니다. 아무리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져도, 혹은 지독하게 모욕적인 일을 겪어도, 제가 받은 감정과 인상을 지면 위에 언어의 형태로 변환하기 전에는 그 사건의 의미가 온전히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로 저는 제 경험에 상상력을 덧붙여 사건을 그럴듯한 이야기로 만듭니다. 사건을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을 때, 아니면 단순히 제가 느낀 감흥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을 때 그렇게 합니다. 사건의 주인공조차 자신의 이야기인지 모를 정도로 교묘하게 각색하고 기호화하여 모두가 이 가공된 이야기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끌어낼 수 있도록 소설의 형식을 갖춰 경험을 재서술합니다. 그러면 독자들은 각자의 기억 속에 묻어둔 삶의 한 조각을 떠올려 내게도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그것은 정말 그런 뜻인 것 같다고, 사건의 의미를 공유하고 감응합니다. 내가 경험한 일의 의미를 해석하고 그 해석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 그것이 제가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글쓰기가 몸을 초과하는 행위라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어떤 사건을 글로 쓰겠다는 마음의 기저에는 내가 지금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 이내 소멸하게 될 순간들을 붙잡아 그것을 오래도록 존재하게 하고 싶다는 욕망, 즉 필멸이라는 한계를 초과해 영원히 머물게 하고 싶다는 욕망이 전제돼 있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는 사건과 성찰의 주체로서 ‘나’라는 존재의 불멸에의 욕망과 필연적으로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가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말입니다.
다만 이 모든 인식론상의 담론도 먼저 몸이 있고 난 후에 가능하다는 점을 짚고 싶습니다. 일단 몸이 공간을 거닐고,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을 둘러싼 공기를 감각하고 느끼고 성찰하는 사건들을 겪은 후에야 우리는 그것을 초과하는 행위로서 글쓰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뭔가를 쓰고 싶다면, 불멸과 필멸, 초과와 미달, 그런 것들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몸으로 세상을 만나는 게 순서입니다.
그래서 저도 지난 한 달간 태백산과 치악산을 오르고 강릉의 호수와 바다를 부지런히 걸었습니다. 그러다 간간이 멈춰 서서 제가 겪은 일들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그 시간 동안 혼자일 때도 있었고 함께이기도 했습니다. 혼자일 땐 함께 있고 싶었고, 함께일 땐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 밖을 헤맬 땐 집으로 가고 싶었고, 집에 있으면 얼른 떠나고 싶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제게 없는 것들을 욕망하지만 막상 그것을 얻으면 그것이 없던 때를 그리워했습니다. 몸을 움직이는 동안 정신은 이런 삶의 진실을 포착하고, 그 진실은 글로 표현된 후에야 온전하게 이해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삶의 비밀을 알고 싶다면, 필멸하는 몸이 서럽다면, 소설이든 에세이든 뭐라도 쓰고 싶다면, 일단 나가서 노시기 바랍니다. 모든 글의 시작엔 몸이 있고 글은 이 취약하고 유한한 몸이 세상을 만난 후에 써질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