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호의 BOOK 회귀선
(14) 홍아미 작가(81년생, 백석동)

여행은 새로운 사람이 되는게 아니라
진정한 나를 만나는 일에 가까워
떠남은 결국 나 자신에게 가는 길

안읽던 책, 안가던 미술관, 새로운 사람 등
열린 마음과 호기심 잃지 않는다면
떠나지 않아도 여행은 가능하죠

산티아고 순례길 중 레온 성당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홍아미 작가.
산티아고 순례길 중 레온 성당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홍아미 작가.

[고양신문] 방학과 휴가철 때문일까요? 여름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떠날 생각부터 합니다. 바다를 보고 싶고 기차를 타고 싶고 도시락을 싸서 어디든 가고 싶어집니다. 친구들과 무엇을 하며 놀지 상상하느라 마음이 먼저 길을 떠났던, 어린 시절 소풍 전날처럼 말이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점점 놀지 못하게 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바쁜 일정표와 성과, 효율을 따지다 보면 일상에서 목적 없는 시간은 점점 사라집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계속 떠나고 싶어 할까요. 낯선 길을 걷고, 처음 보는 풍경 앞에 서고, 잠시라도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번 북회귀선에서는 홍아미 여행작가를 만났습니다. 최근 산티아고 순례길 800㎞를 걸으며 길 위의 문장들을 기록한 『까미노의 말』을 펴낸 그는, 여행이란 특별한 장소를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 세상이 건네는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길은 왜 우리에게 말을 거는지, 삶이 권태롭고 공허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무엇을 찾아 떠나는지, 그리고 어른이 된 뒤에도 왜 여전히 여행을 꿈꾸는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른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왜 계속 여행을 꿈꿀까요? 여행은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요?

평생 저 자신에게 물어왔던 질문입니다. 어른이 되자마자 두 달간의 나 홀로 인도 배낭여행을 시작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여행중독자’로 살았기에, 나는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렇게 항상 떠나지 못해 안달인가 궁금하더라고요. 답은 계속 달라지고 있어요. 20대 때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심이 컸고, 일에 매몰되어 살아야 했던 30대 때는 현실도피의 목적이 컸다면, 40대인 지금은 삶과 여행이 같은 궤도로 돌며 저라는 우주를 풍요롭게 형성해나가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행복해지고 싶을 때, 동기 부여받고 싶을 때, 괴로움을 떨쳐내고 싶을 때, 고민에 대한 해답이 필요할 때, 그저 쉬고 싶을 때. 그럴 때 저는 큰 고민 없이 여행을 계획합니다. 저에게는 여행이 ‘삶의 치트키’ 같은 거랍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어요. 모든 사람이 여행을 꿈꾸지도 않고, 여행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여행이 아니라도 누구나 저마다 갖고 있지 않나요? 삶의 치트키 같은 거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여행을 기록하고 책으로 남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작가님은 언제부터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쓰는 사람’이 되셨나요?

시간과 기억은 휘발됩니다. 아무리 좋은 추억도, 소중한 감정도, 인상 깊었던 만남도. 여행도 마찬가지예요. 오죽하면 ‘사진으로 찍는 게 남는 거다’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한국 사람들이 여행 가서 사진에 집착하는 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진 속의 풍경과 표정으로 이 여행이 각인될 거라는 걸 아니까요. 하지만 아닌 거 우리 다 알잖아요. 사진이 아닌 진짜 풍경 속을 걷고, 냄새 맡고, 경험했던 시간들은 그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는 걸.

사실 저도 처음엔 그저 여행 좋아하는 1명의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현실도피 삼아 틈만 나면 해외항공권을 검색하며 남는 시간과 휴가를 모두 여행에 바쳤던 30대 때 결국 번아웃이 왔죠. 비슷한 사정을 가지고 있던 친구들과 3개월의 남미 배낭여행을 떠났습니다. 

눈부신 우유니 소금사막, 티티카카 호수의 맑은 물빛, 비밀을 감춘 듯한 문화유산인 마추픽추까지. 여행을 하면서도 느꼈어요. 평생 한 번 해볼까 말까 한 대단한 순간을 지금 우리는 살고 있구나. 이걸 그냥 휘발되게 두면 안 될 것 같았고요. 한국에 돌아온 후 여행을 함께한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서울에 작업실을 내고 처음으로 여행에세이를 썼답니다. (『지금 우리 남미』, 폭스코너, 2017) 물론 이를 투고하고 책으로 만들기까지 어마어마한 시간과 수고, 실패가 있었지만, 그 과정과 출간된 후 저에게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이 여행 그 자체보다 더 많은 영감을 주었던 것 같아요. 

신간 『까미노의 말』은 산티아고 순례길 800㎞를 걸으며 만난 문장들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습니다. 작가님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은 어떤 길이었고, 그 길에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은 무엇이었나요?

2024년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했습니다. 사실 20대 때부터 버킷리스트로 삼았던 여행이었는데요. 다소 늦게 실천에 옮기게 된 셈이었죠. 처음 계획을 할 때는 여행의 초심, 그러니까 직접 배낭을 메고 걷는 도보여행이 주는 진짜 여행의 매력을 다시 찾고 싶다는 마음이었어요. 하지만 실제로 가보니 환상과 실제는 달랐어요. 10㎏에 가까운 짐을 짊어지고 매일 수십 ㎞를 걷는 일도 만만치 않고 당연히 체력도 예전 같지 않고요. 게다가 갑작스레 가족상을 치르고 출발하게 되면서 오만가지 생각에 걷는 동안 과거에 대한 되새김질도 계속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던 중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어요. 길이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 거예요. 순례자의 낙서, 현지인의 안내문, 표지판, 조형물 등 순례길 위에서 만나는 다양한 언어의 문자들이 자꾸 눈에 밟혔는데 그게 꼭 저는 길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더라고요. 36일간 길을 걸으며, 길이 거는 말을 수집하는 동안, 상실의 슬픔이 사랑과 감사함으로 승화되는 의미 깊은 경험을 하게 된 것이죠. 

사람들은 종종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작가님은 여행이 사람을 조금 더 자유롭거나 다정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네, 그럼요. 여행만큼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요. 하지만 그 변화는 새로운 사람이 된다기보다는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역할과 의무에 묶여 살아야 하는 일상 속에서는 아무래도 하고 싶은 일도 미뤄야 하고, 본성 그대로 표현하고 살기가 어렵죠. 공간과 시간, 일, 자기계발, 인간관계 등등이 실처럼 연결되어 있는, 마치 마리오네뜨 인형처럼요.
 
어떻게 보면 여행이란, 잠시 그 실을 끊어내고 다른 시간과 공간에 나를 두어보는 일이 아닐까요. 날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다른 시간을 살며,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 나는 어떤 실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롯이 중력만을 느끼며 땅을 딛고 서게 되지요. 그때 느껴지는 자유로움은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 가운데 지금도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나요? 작가님의 삶에 작게나마 흔적을 남긴 풍경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이번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이 특별했던 이유는 아마도 특유의 순례자 문화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순례길을 걷는 사람을 ‘순례자 Peregrino’라 칭하는데요. 순례길이 고립된 지역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 여행자나 현지인들도 만날 수 있지만, 희한하게 순례자끼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가 있더라고요. 대개는 등산복에 배낭을 멘 차림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아마 태도나 눈빛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일반 관광객들은 현재를 즐기기 위해 사진을 찍고 최대한 많은 것을 담기 위해 두리번거린다면, 순례자들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길의 방향을 안내해주는 노란 화살표만을 좇거든요.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고, 같은 방향을 향해 걷습니다. 모두 같은 길을 걷는 동료라는 의식이 있어서인지 조건 없이 서로를 돕습니다. 오늘 내가 도움을 받았다면 다음날엔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요.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방식을 배울 수 있었죠.

멀리 떠나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떠나지 않아도 여행 같은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요? 고양시민들에게 일상 속에서도 여행자의 시선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몸으로 하는 여행만 있는 게 아니에요. 마음 혹은 상상으로 하는 여행, 사람으로 하는 여행도 있습니다. 평소 안 읽던 장르의 책을 읽고 안 가던 미술관을 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보세요. 낯선 것에 대한 열린 마음, 호기심을 잃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도 얼마든지 여행에서 느끼는 자유로움과 신선한 자극을 만나볼 수 있을 겁니다. 

삶이 지루하고, 공허하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사람에게 작가님은 어떤 말을 건네고 싶으신가요?

삶이 지루한 이유는 더 이상 지금보다 나아질 게 없고, 새로울 것도 없을 거라는 염증과 피로에서 비롯되는 것 아닐까요. 그럴 땐 내가 미지의 공간 속에 작은 손전등만 켜고 있는 게 아닐까 상상해보는 거예요. 조명으로 비춰보는 아주 작은 부분만이 내 세계의 전부가 아니잖아요. 불이 환하게 켜지면, 거기엔 총천연색의 아름다운 정원과 으리으리한 가구, 멋진 그림과 장식품으로 가득하다는 걸 알게 될 테죠. 물론 어둡고, 더러운 부분도 있을 테지만요. 적어도 내가 지금 살고 있고, 알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지루함은 싹 가시지 않겠어요? 불을 어떻게 켜면 되냐고요? 여행을 떠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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