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책속으로 떠나는 여행
(14) 김영하 <검은꽃>

국제 브로커에 속아 멕시코행 선택한
황족, 고아, 신부 등 다양한 계층 사람들
에네켄 농장서 혹독한 노동 착취 시달려

고국과 단절된 채 새로운 공동체 꾀하지만
혁명과 내전 속 떠돌다 사라지고 잊혀져
1905년 실화 바탕한 김영하 역사소설

멕시코 농장에서 한인 노동자들이 에네켄(용설란의 일종)잎을 잘라내고 있다. 재외동포재단 제공멕시코 이민 초기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 노동자들의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김영하 작가

[고양신문] 푸른 카리브해와 마야, 아즈테카 문명을 품고 있는 나라 멕시코, 이 멀고 낯선 나라에 120년 전 한 달 넘게 배를 타고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 1905년 4월 제 나라 국민도 보호할 힘이 없었던 대한제국 시절, 국제 이민 브로커의 사기에 속아 가진 것 없는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좋은 일자리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떠났다. 영국 상선 일포드호에 탄 1033명의 조선인들이 제물포항을 떠나 한 달 열흘 만에 도착한 곳은 살기 좋고 부강한 나라에서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광고와 달리 살인적인 더위와 모래바람 부는 황무지에 마실 물조차 귀한 곳이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에네켄 농장의 고된 노동과 채무노예 생활이었다. 다행히 이들의 가혹한 노예노동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멕시코 이민은 한 번으로 그쳤지만, 먼저 떠난 사람들은 뒤따라오는 한국인들이 없어 모국과 단절되고 고립된 채 잊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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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는 이렇게 떠난 천여 명의 이민사를 장편소설로 그려냈다. 가장 도시적이고 세련된 감각적인 작가로 평가받는 김영하가 이처럼 묵직한 역사소설을 썼다는 사실은 의외지만, 김영하는 이를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그는 멕시코와 과테말라를 직접 답사하고 자료를 모아 현지에서 집필을 시작했다. 그동안 멕시코 이민의 가혹한 삶은 영화와 다큐멘터리로 어느 정도 알려졌지만, 김영하의 담백하고 드라이한 문장으로 읽는 맛은 또 다르다. 한 치의 감상주의도 허용하지 않고 가혹한 운명 앞에서 고난과 좌절, 극복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인간적 존엄을 지켜가는 모습은 처절하고 아름답다. 

멕시코 농장에서 한인 노동자들이 에네켄(용설란의 일종)잎을 잘라내고 있다. 재외동포재단 제공멕시코 이민 초기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 노동자들의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국제 이민 브로커가 멕시코 이민 모집을 위해 황성신문에 낸 광고는 사람들을 혹하게 했다. 고아 소년 김이정도 광고를 보고 배를 탔다. 배에는 농민은 물론 몰락한 양반, 도둑, 박수무당, 파계 신부, 전직 군인 등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대한제국 신식군대의 군인이었던 조장윤은 병력이 감축되면서 갈 데 없어진 동료 이백여 명과 함께 배를 탔다. 이름도 없이 살던 고아에게 사람은 이름을 가져야 한다며 김이정이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신앙에 회의를 느낀 신부와 그에게서 은십자가를 훔친 도둑도 한 배에 타고 있었다. 고종의 육촌 이종도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황족들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부인과 아들 딸을 데리고 멕시코행을 택했다. 배에 탄 각기 다른 신분 인물들의 삶의 역정은 서로 만나고 얽히면서 조각보를 잇듯 한편의 서사를 완성한다. 운명에 희롱당하는 이들은 굴복하고 살아남거나 그에 맞서 싸우다 패배하는 인간 존재의 필연을 보여준다. 

배안은 하나의 세계였다. 남녀의 구분도, 신분의 구별도 없이 짐짝처럼 부려진 사람들, 조선을 떠나자 신분 질서는 바로 무너지고 아무도 이종도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쳐다보고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가는 상것들을 나무랄 사람도 없다. 지체에 걸맞은 선실을 요구하는 갓 쓴 양반의 허세는 다른 사람들에게 구경거리일 뿐이다. 몸을 씻거나 세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악취는 심해지고, 식솔들과 함께 칸막이도 없는 화물칸에서 온갖 천민들과 같이 지내야 하는 황족 이종도의 처지는 딱하기 이를 데 없다. “거대한 파도가 배의 옆구리를 밀어젖힐 때마다 흘수선 아래의 화물칸에 수용된 조선인들은 예의와 범절, 삼강과 오륜을 잊고 서로 엉켜버렸다. 남자와 여자가, 양반과 천민이 한쪽 구석으로 밀려가 서로의 몸을 맞대고 민망한 장면을 연출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요강이 엎어지거나 깨지면서 그 안에 담겨 있던 토사물과 오물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욕설과 한탄, 비난과 주먹다짐이 일상사였고 고약한 냄새들은 가시지 않았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멕시코 농장에서 한인 노동자들이 에네켄(용설란의 일종)잎을 잘라내고 있다. 재외동포재단 제공멕시코 이민 초기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 노동자들의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멕시코 이민 초기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 노동자들의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현실 인식이 전혀 안 되는 이종도와 달리 그의 딸 연수는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자도 신학문을 배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다. 조신한 사대부가의 여식이라는 외양과 달리 담대하고 발칙한 연수는 배안에서 이정을 만나 사랑을 나눈다. 천민인 고아 이정과 황족인 연수의 사랑은 조선을 벗어나는 순간 신분이라는 굴레가 아무 의미 없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두 사람의 인연은 도착한 후에도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어진다. 사십 일 만에 도착한 곳은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주도 메리다, 여기서 이민자들은 20여개의 에네켄 농장으로 팔려간다. 
산도 강도 없는 황막한 평원, “평생 지평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조선인들에게 이 벌판의 황막함은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이 뜨거운 사막에서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사람 키만한 가시투성이 에네켄 잎을 잘라내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에네켄 잎은 선박용 밧줄의 원료로 쓰인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채찍질이 가해졌다. 조선에서 채찍질이란 짐승한테나 하는 짓이다. 아무리 기혹한 지주라도 사람에게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에네켄 농장에서 그것은 일상이었다. 집세와 생필품값은 너무 비싸 하루 열댓 시간씩 일하고 받는 임금으로 끼니를 때우기에도 빠듯했다. 농장주들은 농민들을 채무노예로 묶어두고 그들을 착취했다. 멕시코 혁명의 영웅 사파타가 봉기한 것도 멕시코의 대농장 아시엔다의 구조적인 착취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선인은 원주민 마야인보다 더 못한 처우를 받았다. 

농민이나 천민 출신들은 어렵게 적응해 나갔지만, 이종도는 가족이 모두 굶는 지경이 되어도 신분을 고집하며 끝까지 농장에 나가지 않고 서책만 본다. 어쩔 수 없이 열네 살 아들이 아비를 대신한다. 이종도는 조선인의 참상을 황제에게 알리겠다고 아들에게 붓과 종이를 구해오라고 호통치지만 유카탄 반도에 그런 것이 있을 리 없다. 어렵사리 구해온 펜으로 익숙지 않은 글을 써서 통역인에게 부쳐달라고 부탁하지만 그의 서한은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이종도는 망해가는 나라를 떠나 신분도 사라진 이국땅에서 끝까지 현실을 부정하고 구시대적 질서에 집착하다가 모든 권위를 잃고 먼지처럼 사라진다. 비극적 인물이지만 그 비극에 장엄미는 없다. 고아 소년 김이정은 혁명전사가 되고, 그와 사랑하던 연수는 몇 남자를 거친 끝에 고리대금업에 유흥업, 매춘업에까지 손을 대면서 황폐해진다. 작가는 이들의 사랑에 일말의 낭만도 허용하지 않는다. 가톨릭 신부는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되고 그에게서 십자가를 훔쳤던 도둑은 광신자가 되어 십자가에 매달린다. 무겁고 어두운 서사 공간에 작가의 아이러니가 곳곳에서 번득인다. 

멕시코 농장에서 한인 노동자들이 에네켄(용설란의 일종)잎을 잘라내고 있다. 재외동포재단 제공멕시코 이민 초기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 노동자들의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멕시코 농장에서 한인 노동자들이 에네켄(용설란의 일종)잎을 잘라내고 있다. 재외동포재단 제공

맨발에 누더기를 걸치고 가축처럼 사는 이들의 참상이 미국의 중국계 신문에 실리고 다시 한국인 유학생을 통해 고국에 알려졌다. “농장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무릎을 꿇리고 구타를 당하여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하니 차마 못 볼 광경에 통탄을 금할 수 없다.” 황성신문에 이러한 소식이 실리고 여론이 악화되자 고종은 이들을 귀환시킬 방책을 구하라는 칙령을 내리지만, 그 사이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박탈당한다. 
4년의 계약기간이 끝닜지만 이들은 돌아갈 여비도 없는 데다 무국적자가 되어 한 사람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들 중 일부는 멕시코에 불어닥친 혁명과 내전의 바람에 휩쓸린다. 조장윤을 비롯한 전직 군인들과 김이정은 혁명전사가 되어 전장을 전전하고 그 와중에 이웃나라 과테말라의 정변에 용병이 된다. 이들은 밀림 속 마야 유적지에서 ‘신대한’을 국호로 내건 소국을 세워보지만, 정부의 대대적인 소탕작전에 의해 대부분 전사하고 만다. 
대한제국의 백성이었던 사람들이 멀고 먼 과테말라의 밀림에서 사라지고 멕시코 전역을 떠돌다가 원주민과 섞이면서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일부는 쿠바로 이주했다. 120년 전 이름도 낯선 멕시코로 떠났다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검은 꽃처럼 사라지고 잊혀진 나라 없는 백성들의 삶이 안타깝다. 못난 나라의 백성 노릇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아무리 못나도 내 나라는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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