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황희의 노변정담(11)
풍월무변(風月無邊)


자연의 무궁함 노래하는 ‘풍월무변’
한중일 3국 사유의 공통분모지만
자연관‧정신사 깊이는 미묘한 차이

한국, 자연과 더불어사는 삶의 태도
중국, 감상보다 수양‧깨달음의 장
일본, 경계를 넘는 공감의 미학 해석

동아시아 3국의 달이 하나이듯 풍월은 변함없지만, 풍월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사유는 문화마다 서로 다른 깊이를 품는다.
동아시아 3국의 달이 하나이듯 풍월은 변함없지만, 풍월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사유는 문화마다 서로 다른 깊이를 품는다.

[고양신문] 일찍이 동파(東坡)는 자신이 머물렀던 정자인 임고정(臨皐亭)을 두고 지은 시 「임고한제(臨皋閑題)」에서 “강산과 바람과 달은 본래 정해진 주인이 없으니 한가한 자, ‘한자(閑者)’가 곧 그 주인이다”라고 하였다.

강산풍월 본무상주(江山風月 本無常主), 한자편시주인(閑者便是主人)

이 말은 자연과 풍류의 주인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는 유가적 사유의 감상과 도교적 여백의 이해가 잘 결합된 표현이다. 속세의 욕망에 바쁘지 않은 ‘한자(閑者)’, 즉 세속의 일에 초연하여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야말로 자연과 풍류를 소유하고 누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풍월무변’이 자연과 풍류의 무궁함을 나타내는 관용구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주자로부터 비롯되었다. 주희는 자신이 존경하는 여섯 분의 선현 초상화를 그리고 거기에 찬사를 덧붙인 〈육선생화상찬(六先生畫像贊)〉을 지었다. 그 가운데 〈염계선생(濂溪先生)〉 주돈이(周敦頤)를 가리켜 ‘풍월무변(風月無邊), 정초교취(庭草交翠)’라 하였다. 스승 주돈이의 ‘도와 덕은 바람과 달처럼 무궁하며, 뜰의 푸른 풀처럼 청정하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풍월무변’이란 단순히 자연경관의 아름다움만을 찬미하는 말이 아니라 주돈이의 덕행과 학문이 자연처럼 무궁하며 청정하다는 상징적 찬사이므로 청정한 자연의 아름다움에 지행합일의 무궁한 의지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조선에는 이에 필적할 만한 것으로, 도가의 소요유(逍遙遊)’와 유가의 ‘무심지경(無心之境)’을 통섭하여 구현한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시가 있다. 선악의 시비를 떠난 평온한 심경, 하늘과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지극한 경지를 노래한 절창이다. 

말 없는 청산이오, 태(態)없는 유수로다.
값없는 청풍이요, 임자 없는 명월이라
이 중에 병 없는 이 몸이 분별없이 늙으리라

청산무어(靑山無語), 유수무태(流水無態).

청풍무가(淸風無價), 명월무주(明月無主).

오신무병(吾身無病), 혼연이로(混然以老).

일본을 대표하는 풍월무변도 있다. 나라(奈良) 시대에 일본이 중국의 ‘감진(鑑眞)’ 스님을 청하고자 할 때, 학승 ‘나가야왕(長屋王)’이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이런 시를 지어 바쳤다. 국경은 달라도 불법(佛法)의 인연은 하나라는 뜻을 담은 시이다. 당나라의 승려들이 이 시에 감동하였으며, 결국 고승 ‘감진(鑑眞)’이 일본에 건너가 불교를 전하게 된다. 이 네 구절은 한·중·일 불교 교류의 상징시로 매우 유명하다.

산과 강은 서로 다른 곳에 있지만 바람과 달과 같은 하늘 아래 있다네

비록 서로 떨어져 있을지라도 산과 강은 함께 존재한다네

바람과 달은 끝이 없어도 천지 안에 한 가족이라오

산천이역(山川異域) 풍월동천(風月同天)

수연이역(雖然異域) 산천공존(山川共存)

풍월무변(風月無邊) 천지일가(天地一家)

중국 여행을 하다 보면 항주 서호(西湖)의 호심정(湖心亭)이나 태산의 비석에 ‘충이(虫二)’라고 새겨진 글씨를 볼 때가 있다. 본래의 글자 ‘風’과 ‘月’에서 외곽 부수(部首)를 제거하여 핵심 형태만 남기면 ‘충이(虫二)’가 된다. 그러므로 ‘충이(虫二)’는 축약된 이미지로서의 ‘풍월무변(風月無邊)’을 암시하는 문자 유희이다. 풍월무변의 시대를 넘나드는 흥취로는 이백의 ‘술잔을 들고 달에게 묻는다’라는 시 ‘파주문월(把酒問月)’을 빼놓을 수 없다.

오늘의 사람은 옛날의 달을 볼 수 없지만

오늘의 이 달은 한때 옛사람들을 비추었지.

금인불견고시월(今人不見古時月)
금월증경조고인(今月曾經照古人)
 
세월의 무상함과 인간의 존재가 실로 덧없다. 사람은 세월 속에 흘러가지만, 달은 변치 않고 다시 떠올라 세대를 초월한 존재로 남는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조물주의 자연은 영원하리라. 

‘풍월무변’이라는 이 한 구절은 동아시아 삼국이 자연을 이해하고 인간의 자리를 성찰해 온 사유의 공통 분모이자, 동시에 각 문명권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변주해 온 정서의 갈래를 보여 준다. 중국, 한국, 일본에서의 풍월무변은 동일한 자연을 바라보되, 그것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윤리, 그리고 세계를 해석하는 깊이에서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먼저 중국에서의 풍월무변은 ‘우주적 질서와 도덕적 완성의 은유’에 가깝다. 주돈이와 주희로 이어지는 성리학 전통에서 바람과 달은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하늘의 이치와 도의 무궁함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풍월무변’은 자연의 끝없음이 곧 도의 끝없음이며, 인간이 수양을 통해 도에 합일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동파 소식의 ‘한자편시주인(閑者便是主人)’ 역시 자연의 주인은 소유자가 아니라, 마음을 비운 자라는 윤리적 선언이다. 중국의 풍월은 감상 이전에 ‘수양과 깨달음의 장’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풍월무변은 ‘삶의 자리에서 체득된 무심과 소요의 경지’에 가깝다. 우계 성혼의 시에서 보이듯, 말 없는 산과 태없는 물, 값없는 바람과 임자 없는 달은 모두 인간의 분별을 내려놓은 상태를 비춘다. 한국적 풍월은 우주적 도리를 설파하기보다 병 없는 몸으로 늙어 가는 일상의 평온, 즉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의 태도를 중시한다. 이는 유가의 도덕과 도가의 자연스러움이 생활 속에서 부드럽게 녹아든 결과로, 풍월무변이 ‘사상이라기보다 삶의 호흡’으로 나타난다.

일본에서의 풍월무변은 다시 ‘경계와 차이를 초월하는 공감의 미학’으로 전개된다. ‘산천이역(山川異域), 풍월동천(風月同天)’이라는 구절은 자연이 국경을 넘어 동일하게 이어진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일본의 풍월은 자연을 도덕의 은유로 삼기보다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같은 달 아래 있음을 자각하는 정서적 연대의 언어다. 이는 불교적 무상관과 맞물려, 덧없음 속에서 순간의 아름다움과 인연의 귀함을 포착하는 감성으로 발전한다. 일본의 풍월무변은 ‘사유보다 감응, 교훈보다 여운’에 가깝다.

이처럼 삼국의 풍월무변은 공통적으로 자연의 무궁함을 노래하지만, 중국은 이를 ‘도의 영원성’으로, 한국은 ‘삶의 무심한 평정’으로, 일본은 ‘경계를 넘는 공감과 인연’으로 해석한다. 바람과 달은 같으되, 그 바람을 맞는 마음과 달을 바라보는 눈은 서로 다르다. 결국 풍월무변은 자연에 대한 찬미가 아니라, 자연 앞에 선 인간의 태도에 대한 질문이다. 
서울의 달과 태산의 달, 후지산에서 마주한 달이 모두 하나이듯 풍월은 변함없으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사유와 정서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진다. 한·중·일의 풍월무변은 바로 그 차이 속에서 동아시아 정신사의 깊이를 더욱 풍부하게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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