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의 교통안전 칼럼
[고양신문] 교통사고가 발생하면 운전자들은 사고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 차량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나는 신호를 보고 정상 진행했다, 상대방 차량이 갑자기 나타났다.’ 등의 내용으로 자신이 경험한 상황을 설명한다. 그런데 사고 후 블랙박스 영상을 다시 확인해 보면 자신이 기억했던 상황과 실제 영상에 담긴 장면이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때도 있다. 이렇게 사고 당시의 기억이 왜 실제 상황과 달라지는 것일까.
사고가 발생하는 순간에는 평소와 달리 운전자의 주의가 특정 대상에 집중되기 쉽다. 운전자는 평소에도 신호등과 앞차, 옆 차로의 차량, 보행자, 도로 표지판 등 여러 정보를 동시에 살피면서 운전한다. 그러다 갑자기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이를 피하고자 브레이크를 밟거나 핸들을 조작하는 데 순간적으로 집중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주변에서 벌어진 다른 상황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거나 나중에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사고 직후의 긴장과 당황도 기억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실제로는 사고가 발생하기 전 몇 초 동안 여러 가지 상황이 이어졌지만, 운전자에게는 충돌 순간이나 상대 차량의 움직임이 가장 강하게 남을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사고 전후의 과정 일부가 빠지고 자신이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장면을 중심으로 당시 상황을 설명하게 된다. 이는 반드시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다. 사고 당시의 경험과 이후의 기억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고 이후의 감정과 판단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고가 발생하면 누구나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면서 당시 상황을 해석하게 된다. ‘나는 정상적으로 운전했는데 상대방이 잘못했다’라는 생각이 강해질 수도 있고, 반대로 상대방의 행동만 지나치게 기억할 수도 있다. 따라서 사고 직후의 기억만으로 당시의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재구성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때 블랙박스 영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블랙박스는 운전자가 당시 의식적으로 인식했는지와 관계없이 일정한 범위의 도로 상황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운전자의 기억에서 빠진 장면이나 사고 전후의 차량 움직임을 다시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운전자는 상대 차량이 갑자기 끼어들었다고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블랙박스 영상을 사고 직전 몇 초 전부터 다시 살펴보면 상대 차량이 이미 옆 차로에서 주행하고 있었거나 차선을 변경하기 시작한 모습이 확인될 수도 있다.
반대로 운전자는 상대 차량의 움직임을 분명히 봤다고 생각했지만, 영상에서는 실제로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다. 이처럼 기억과 영상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사고가 발생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물론 블랙박스 영상 자체를 사고의 모든 것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블랙박스 역시 촬영 각도와 화각, 영상의 품질 등에 한계가 있고, 화면에 기록된 정보만으로는 차량의 정확한 속도나 운전자의 의도까지 모두 확인하기 어려울 수가 있다. 따라서 사고의 원인과 책임을 판단할 때는 블랙박스 영상뿐만 아니라 신호 상태와 차량의 위치, 진행 방향, 속도, 차선, 도로 구조, 주변 차량과 보행자의 움직임 등 여러 요소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블랙박스가 중요한 이유는 사고 당시의 기억에만 의존하지 않고 사고 전후의 상황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특히 사고 직후에는 서로 나는 정상적으로 운전했다거나 상대방이 갑자기 들어왔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기억이 정확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때 감정적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먼저 단정하기보다 영상과 주변 상황을 차분하게 확인하는 것이 사고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블랙박스는 상대방의 잘못을 입증하기 위한 장치로만 활용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전을 돌아보는 자료로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고 영상을 확인하면서 상대방의 행동만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고 직전 어떤 속도로 주행했는지, 앞차와의 거리는 적절했는지, 차선을 변경할 때 충분히 주변을 확인했는지, 위험을 예상하고 미리 감속했는지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평소 녹화된 영상을 확인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운전할 때는 익숙해서 잘 느끼지 못했던 습관이 영상에서는 의외로 선명하게 보일 수 있다. 차간거리를 지나치게 짧게 유지하거나 방향지시등을 늦게 사용하는 습관, 교차로에서 충분히 감속하지 않는 행동, 앞차의 움직임에 조급하게 반응하는 모습 등을 직접 확인할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블랙박스 영상에서 누가 더 잘못했는지만 찾는 것이 아니다. 사고가 발생하기까지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를 차분하게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미처 보지 못했던 위험이나 잘못된 운전습관은 없었는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다. 사고의 책임을 가리는 것과 사고를 예방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지만, 정확한 원인을 파악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교통사고가 나면 누구나 상대방의 잘못부터 찾고 싶어진다. 그러나 블랙박스 영상을 다시 볼 때는 한 번쯤 다른 질문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상대방은 무엇을 잘못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나는 그 순간 무엇을 놓쳤을까’라는 질문을 해보는 것이다.
사람의 기억은 사고 당시의 긴장과 감정, 주의가 집중된 대상에 따라 실제 상황과 달라질 수 있다. 블랙박스는 이러한 기억의 한계를 보완해 사고 전후의 상황을 다시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그 영상을 통해 자신의 운전까지 돌아본다면 블랙박스는 단순히 사고의 책임을 가리는 기록장치를 넘어 같은 사고가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교통안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어쩌면 블랙박스가 가장 냉정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상대방의 실수가 아니라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나 자신의 운전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인정하고 한 번 더 돌아보는 것, 그것이 사고 이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통안전의 교훈일 것이다.
이광수 일산서부경찰서 경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