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6일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
독자적 조형기법 ‘유결법(揉結法)’으로
한지 추상 조형의 진수 선보여
서예가 김백호 ‘때시(時)’ 특별출품도
[고양신문] 한 장의 한지가 예술이 되기까지, 그 안에는 얼마나 많은 손길과 시간이 스며 있을까. 30여 년간 한지의 물성과 조형적 가능성을 탐구해 온 전진숙 작가가 오는 21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인사동 경인미술관 제3전시관에서 개인전 <결(結)>을 연다.
한지공예 명장이자 대한민국 대한명인인 전 작가는 전통 한지공예를 현대 추상조형예술로 확장해 온 예술가다. 그의 손끝에서 한지는 고유한 질감과 입체적인 형상을 얻고, 시간과 삶의 흔적을 담아내는 예술적 언어로 거듭난다.
전시 제목인 ‘결(結)’에는 자연이 품은 결, 시간이 쌓아 올린 결,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인연의 의미가 담겨 있다. 작가는 이러한 관계와 흔적을 한지 특유의 섬유질과 절제된 색채, 입체적인 추상조형으로 표현했다.
작품세계의 중심에는 오랜 연구 끝에 발전시킨 독창적인 조형기법 ‘유결법(揉結法)’이 자리한다. 전통 줌치기법을 바탕으로 한지를 적시고 여러 겹 포갠 뒤 일정 시간 숙성시키고, 손으로 비비고 치대고 압착하는 과정을 거듭한다. 이 과정에서 한지의 섬유는 풀어지고 다시 얽히면서 새로운 조직을 형성한다. ‘유(揉)’는 비비고 주무르는 손의 행위를, ‘결(結)’은 섬유가 서로 얽혀 새로운 결을 이루는 과정을 뜻한다.
이렇게 탄생한 주름과 틈, 미세한 요철은 빛의 방향과 관람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표정을 드러낸다. 굴곡 사이에 형성된 음영은 평면의 한지에 입체적인 공간감을 부여하고, 섬유의 결은 화면 전체에 독특한 깊이와 리듬을 만들어낸다. 특히 겹겹이 쌓인 한지의 표면은 굴곡과 상처, 회복과 성숙이 공존하는 인간의 삶을 연상시킨다.
전진숙 작가는 “내게 한지는 오랜 세월 우리 민족의 삶과 정서를 품어온 소중한 재료다. 그 안에는 자연의 숨결과 사람의 손길, 시간이 남긴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한지가 지닌 본래의 성질을 존중하면서도 그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조형적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수없이 비비고 치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주름은 삶의 굴곡을 닮았고, 섬유가 서로 얽혀 단단해지는 모습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관람객들이 작품 앞에서 한지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기억, 삶의 결까지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번 개인전에는 서예가 김백호의 ‘때시(時)’ 작품도 특별출품된다. 한지의 섬유가 빚어낸 조형적 리듬과 붓의 움직임이 남긴 서예의 필획이 한 공간에서 만난다. 서로 다른 예술적 형식이지만 시간과 행위의 흔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 미학을 보여준다.
관람객은 작품을 바라보는 거리와 각도에 따라 색다른 조형적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가까이에서는 섬유의 미세한 조직과 주름을 살피고, 한 걸음 물러서서는 작품 전체의 리듬과 공간감을 감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30여 년간 한지라는 하나의 재료에 몰두해 온 예술가의 집념과 시간이 응축된 <결>은 전통 공예의 깊이와 현대미술의 조형적 감각을 함께 만날 수 있는 자리다. 화려한 색채보다 재료가 지닌 본질에 집중하고, 반복된 손의 노동을 예술적 표현으로 승화한 작품들은 한지의 새로운 미학을 보여준다.
가을의 정취가 깊어지는 인사동에서 한국 전통 재료의 아름다움과 현대 추상예술의 독창성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미술 애호가는 물론 전통문화와 공예에 관심 있는 시민이라면 가을 문화 나들이 목록에 담아볼 만한 전시다.
전시는 26일까지 열리며, 24일 오후 2시에는 전진숙 작가가 직접 자신의 작품세계와 창작 과정을 소개하는 ‘작가와의 만남’이 마련된다. 한 장의 종이에 새겨진 수많은 손길과 시간의 흔적. 전진숙 작가의 <결>은 한지가 지닌 예술적 깊이를 발견하고, 저마다의 삶에 새겨진 결을 돌아보는 특별한 시간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