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근의 동네서점기행(16)
내가 만든 공간에 타인이 들어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작품 변신
[고양신문] “작품에는 우리의 생각, 감정, 과정, 무의식적인 믿음의 에너지가 숨겨져 있다. 이 보이지 않고 측정할 수 없는 힘이 작품에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힘을 부여한다. 완성된 프로젝트는 우리의 의도와 실험으로만 구성된다. 의도를 제거하면 장식용 껍데기만 남는다.”
—릭 루빈, 『창조적 행위: 존재의 방식』
서점의 문을 연 지 2년 정도가 됐다. 스스로 요즘의 서점 운영을 평가하면 대충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릭 루빈의 『창조적 행위: 존재의 방식』을 읽었다. 책은 예술가와 작품에 대한 저자의 생각으로 꽉 차 있다. 스스로를 예술가로 정의하지 않는 나에게 “그러지 말라”라고 말해준다. 책을 인용하자면 “공식적으로 예술 작품을 만드는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예술가로 살고 있다. 인식하고 필터링하고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경험을 큐레이팅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단지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늘 현재진행형인 창조 과정의 적극적인 참여자이다.” 나는 예술가다. 세리서점은 나의 작품이다.
세리서점이 내 작품이라면 지금처럼 방만하게 운영할까. 릭 루빈의 『창조적 행위』를 읽으며 나의 태도를 돌아본다. 루빈은 창조성을 특별한 사람의 재능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세상을 관찰하고, 무엇을 만들어내는가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나도 매일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창조하고 있다. 주문할 책을 고르고, 책을 배치하고, 손님을 초대한다. 문제는 내가 그 선택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느냐는 것이다. 요즘은 익숙해졌다는 이유로 대충 넘어가는 일들이 너무 많아졌다. 며칠째 그대로인 매대를 그대로 두다가 별 고민 없이 책장에 오랫동안 꽂혀 있던 책과 바꾼다.
세리서점을 내 작품으로 여긴다면 나는 무엇을 만들고 있는 걸까. 책을 골라 진열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만나 대화하는 장면일까. 새로운 관계일까. 내가 살고 싶은 동네의 모습을 공간 안에서 시도하는 것일까. 그렇게 보면 이 작품의 재료는 책과 가구뿐만이 아니다. 이곳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시간, 누군가의 방문, 누군가의 제안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루빈은 타인의 반응을 계산하기보다 자신이 좋다고 느끼는 작업에 충실하라고 한다. 듣기 좋은 말이다. 이 생각을 따르자면 유명하고 손님들이 많이 드나드는 서점의 기준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 얼마나 팔렸는지와 함께,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얼마나 의도한 대로 구체적인 모습이 되었는지를 보면 된다. 왜 이 책은 문 가까이에 두었는가. 왜 이 사람을 초대했는가. 왜 이런 모임을 계속하는가. 자영업자로서 관성적으로 반복하던 일들은 내 마음먹기에 따라 작품을 만드는 선택이 된다.
서점을 나의 창조적 표출이자 작품으로 여기면 서점의 운영이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 나는 무엇을 드러내고 싶은가. 취향인가, 신념인가, 함께 살고 싶다는 욕망인가. 이웃들의 취향을 담겠다면서 내가 좋아하는 이웃의 모습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을 공간의 분위기를 깨는 존재로 여기지는 않는가. 즐겁지 않은 세상에서 혼자만 즐겁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세리서점은 내가 문을 열었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은 내 작품의 재료가 아니다. 각자 자신의 이유로 이 공간에 들어온다. 책만 사고 싶거나 아무 말 없이 앉아 있고 싶을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내가 틀림없이 말을 걸기 때문에 거의 불가능하지만. 내가 공동체적 삶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모두에게 공동체적 관계를 요구할 수는 없다.
커먼즈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면 사람들이 세리서점에 들어왔을 때 무엇을 바꿀 수 있도록 허용하는가. 내가 마련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데서 그치는가. 자신의 모임을 제안하고, 서점 공간을 사용하는 규칙을 제안할 수 있는가. 커먼즈는 문을 열어두는 것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함께 이용하는 사람들이 운영에 관여하고, 필요한 일과 책임을 나누며 공간을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움직인다면 결정권은 온전히 내게 있다. 뭔가 더 고민이 필요하다.
세리서점에서 매주 열리는 에세이클럽은 근처에 사는 홍아미 작가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내가 기획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내가 선택한 일도 아니다. 그런데 이 일이 참 좋다. 에세이클럽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 프로그램을 거의 사랑하기까지 한다. 나도 그렇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내 작품이라고 선언한 공간에서 내가 만들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심지어 내가 만든 것보다 더 마음에 들기도 한다. 내가 처음부터 계획했다면 이런 모임을 만들었을까.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이 지금의 세리서점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세리서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일부는 내 의도대로 변해가지만, 절반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향해 변해간다. 이웃의 제안이 내 의도를 바꾸고, 내가 시작하지 않은 모임이 서점의 일상이 된다. 그때 나는 작품이 훼손됐다고 느껴야 할까, 더 좋아졌다고 느껴야 할까.
세리서점을 내 작품으로 여기는 관점에 끌린다. 그러면서도 나만의 것으로 남겨두고 싶지는 않다. 내가 좋아하는 세리서점의 모습이 반드시 내 의도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모든 것을 내 뜻대로 결정하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그 결과가 내 예상과 달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그것도 창조적 행위라고 부를 수 있을까. 멋진 자영업자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