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윤의 가파도 편지 30>
[고양신문] 가을입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누구나 시인이 되는 계절.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다가도 세월이 물처럼 흘려가는 것을 보며 인생무상을 생각하는 철학자가 되는 계절.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도록 그럴 것이며,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고 낙엽이 떨어져 뒹굴면, 불안스레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헤맬 것입니다.”라는 릴케의 '가을날'을 외우며 고독에 사로잡히기에 딱 좋은 그런 계절입니다.
9월 말에 고양시에 올라와 10월이 지나도록 고양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10월에는 강의도 많고, 기념일과 가족여행, 원고 마감 등의 일정이 연이어져 제주도에 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제주 집주인에게 한 달 치 월세만 송금하고 고양에 머무르며 강의하고, 책 읽고, 글 쓰고, 가족과 일본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아이들이 정해놓은 일정을 따라 하루 만보 이상의 강행군을 해야 하는 힘겨운 여행이었습니다. 이래서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여행을 해야 한다고 말하나 봅니다. 다리는 쑤시고 허리는 아파 부상당한 패잔병처럼 절뚝거리며 여행지를 돌았습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위해 계획한 고마운 여행이라 불평도 못하고 일정을 소화했습니다. 간신히 밤늦게 고양 집으로 돌아와 기절하듯이 쓰러져 잠에 들었습니다.
4박 5일의 여행을 다녀오니, 출판사에서 2교 원고를 보내와 서둘러 검토하느라 시간을 보냅니다. 여행은 재충천이라는데, 나에게 일본여행은 거의 방전에 가까웠습니다. 차라리 집 앞 편의점이나 아파트 내의 정자 벤치가 재충전의 장소입니다. 뒤늦게 도착한 정재승의 신작 『서늘한 대화』와 202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엔 카슨의 『에로스, 달콤씁쓸한』을 손에 들고 아파트 앞 벤치에 앉아 식어가는 커피를 마치며 책을 천천히 읽습니다. 두 책 모두 속독하기에는 다루는 주제도 무겁고 어렵습니다. 정재승의 책은 누구나 읽었으면 좋겠고, 앤 카슨의 책은 호불호가 갈릴 것 같습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 말은 역설적 사실을 반영한 것입니다. 출판계로 치면 가을이 가장 책이 팔리지 않는 계절이라, 억지로라도 책을 판매하기 위해 만든 자기예언적 구호에 해당합니다.
언론매체나 SNS에서는 전쟁과 선거와 시위와 폭동과 주가하락과 유가상승 등 불길한 세계적인 이슈들로 떠들썩하고, 사법개혁과 지방자치와 집값과 주가와 지지율, 과장된 쇼츠, 가짜뉴스, 허황된 선동 등을 담은 정보들이 우리의 머리를 어지럽힙니다. 정치를 하라고 뽑아놓은 사람들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은 쉽게 불안해하고, 더 쉽게 분노합니다. 불안과 분노의 악순환입니다. 이 거대한 태풍에 휩싸이지 말고 여기서 잠시라도 벗어납시다.
나는 거대한 혁명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소소한 서민의 일상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습니다. 아니 세상은 바꿀 수 없을지라도 자신의 삶의 변화는 모색해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이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면, 내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는 작은 실천이 나의 하루를 가치있게 만들 것입니다. 나 없으면 세상이 불안해질 것 같지만, 나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갑니다. 그러니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잠시만이라도 자신을 돌보아도 괜찮습니다.
자연도 가을이 되면 왕성한 활동을 접고 고요히 떨구고 응결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 떨굼이 있기에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를 어지럽히는 전쟁과 정치와 주식과 주택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사랑하는 사람과 산책이나 여행도 진행해 보고, 밀린 책들도 한두 권 독파해 보고, 잠이라도 늘어지게 자세요. 그리고 소원했던 친구라도 만나 차나 술 한 잔 합시다. 우리는 그래도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