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종 기자의 역사문화탐방
⑫ 파주 이이 유적과 화석정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나 파주 율곡리에서 성장
8살 때 지은 ‘화석정시’ 세상 놀라게 한 비범함
자운서원과 가족묘, 신도비, 율곡기념관 한곳에
파주·고양 이웃들이 즐겨찾는 가을 나들이 명소
[고양신문] 전국에 밤골, 또는 밤나무골이라 불리는 마을은 몇 개나 될까. 뒷동산에 밤나무가 많은 동네마다 흔하게 붙여졌던 이름. 가까운 북한산에도 밤골계곡이 있다. 한자로는 율곡(栗谷). 수많은 밤나무골 중 가장 유명한 곳 하나를 꼽으라면 파주에 있는 ‘율곡리’가 아닐까. 5000원권 지폐의 주인공, 성리학의 나라 조선을 대표하는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가 자신의 호를 따온 곳이기 때문이다.
율곡 이이의 뿌리가 되는 고장은 두 곳이다. 하나는 그가 태어난 강원도 강릉의 외가 오죽헌이고, 다른 하나는 덕수 이씨 가문의 세거지로서 이이가 성장기를 보낸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다. 각각 ‘태어난 곳’과 ‘자란 곳’이라는 연고권을 쥐고 있는 까닭에 ‘율곡’이라는 이름은 강릉 지도에도, 파주 지도에도 넘쳐난다. 두 도시 모두 율곡로라는 도로명을 갖고 있고, 학교와 병원, 공원, 광장, 심지어 아파트와 상가 이름에도 ‘율곡’이 흔하다. 산과 들의 단풍이 찬란한 이별을 고하는 11월, 파주의 ‘율곡 명소’를 따라 가을나들이를 떠나보자.
대원군 서원철폐 후 100년 만에 복원
파주시 동쪽 법원읍내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달리면 자운산 자락을 푸근히 두르고 있는 자운서원(紫雲書院)이 나타난다. 율곡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7세기 초에 파주의 지방유림들에 의해 창건된 후 효종 임금으로부터 ‘자운’이라는 편액을 하사받으며 경기북부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자리매김한다. 서원의 구조는 산기슭 경사지형을 따라 외삼문, 유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 경전을 공부하는 강인당, 배향 공간으로 들어서는 내삼문,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 율곡 이이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까지, 유교적 세계관을 건물 배치를 통해 구현한 조선 서원의 반듯한 정형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방문객을 맞는 건물이 조선시대 작품은 아니다. 19세기 후반 전국 대부분 서원들의 운명과 마찬가지로 자운서원 역시 대원군이 휘두른 서원철폐령의 철퇴질을 피하지 못하고 훼철되고 만다. 이후 한 세기가 흐른 1970년 유림들의 뜻과 국가지원이 더해져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전국의 주요 역사유적 중에는 자운서원처럼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 정비된 곳들이 많다. 경제개발에 어느 정도 성과를 얻은 박정희 정권이 국가주도의 사적 정비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쳤기 때문이다. 잘한 일이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최고통치자의 흔적을 과도하게 남겼다는 점이다. 1974년 노산 이은상이 지은 글을 새겨넣은 ‘유적 정화기’에도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특별한 분부로 묘역 전체를 정리하고…’라는 문구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늦가을 정취 가득 물든 ‘파주 이이 유적’
자운서원 바로 옆 언덕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율곡 이이와 부친 이원수, 모친 신사임당 등 가족묘 11기가 자리하고 있다. 인근에는 자운서원묘정비, 이이선생신도비도 찾아볼 수 있다. 각각 우암 송시열과 백사 이항복이 비문을 썼다. 그밖에도 율곡 이이 관련 자료와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는 율곡기념관, 가장 최근(2024년)에 건립된 신사임당 사당, 이이와 신사임당 동상 등을 차례로 둘러볼 수 있다.
이 모든 유적을 아우르는 공간의 공식 명칭은 ‘파주 이이 유적’이다. 초기에는 자운서원, 이이묘, 신사임당묘가 각각 경기도문화재로 지정됐었지만, 관련 유적이 한 곳에 모여있는 장소성이 평가되어 세 곳을 묶어 더 높은 국가유산 등급인 사적(史蹟)으로 승격된 것이다. 그래서 이정표나 내비게이션에도 ‘파주 이이 유적’으로 안내되어 있다.
파주 이이 유적은 역사의 공간인 동시에 많은 이들이 찾는 휴식공간이다. 특히 가을이 깊어가는 무렵이면 수령 지긋한 단풍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가 우아한 단청을 얹은 건물들과 어우러져 오래 머물며 바라보고픈 멋진 경관을 선사한다. 기자 역시 매년 가을이면 한번씩은 꼭 들르곤 한다.
선조의 피란길을 예견한 선견지명?
다음 행선지는 임진강이 내려다뵈는 밤나무골(파평면 율곡리)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 율곡의 5대조가 처음 세우고, 증조부가 중수하며 이름을 붙였다는 ‘화석정(花石亭)’이다. 화석정에서 바라보는 봄풍경이 임진팔경(臨津八景) 첫머리에 꼽힐 만큼 조망이 아름답다. 안내판에는 ‘율곡 이이가 제자들과 함께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이라는 설명이 적혀있다.
화석정에는 율곡 이이와 관련된 두 개의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하나는 이이가 불과 8살 때 지었다는 ‘화석정시’다. 화석정의 가을 풍광과 심상을 빼어난 문장으로 표현해 일찌감치 천재성을 세상에 알린 작품으로 알려졌다. 두 번째는 임진왜란 당시 화석정 앞 임진나루를 건너 의주로 피난을 갔던 선조임금과 관련된 일화다. 일찍이 전란을 예견했던 이이가 평소 화석정 마루와 기둥에 들기름을 먹이게 하고, 선조임금을 보필해 피난길에 나선 신하에게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는 밀지를 남긴 덕분에 선조임금이 불빛에 의지해 강을 무사히 건넜다는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다.
말이 나온 김에 짚어보자면, 율곡 이이에게는 거의 신화적 성격을 띠는 일화들이 유난히 많이 따라다닌다. ‘어머니 신사임당이 동해바다 검은 용이 침실로 날아드는 태몽을 꾸고 이이를 낳았다’는 이야기도 내려오고, ‘세 살 때 말을 배우자마자 곧바로 글을 읽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비범한 아이 율곡에게 호환이 닥칠 것을 두려워한 부모가 밤나무 1000그루를 심었는데, 한 그루가 모자랐지만 한 나무가 “나도밤나무”라고 외쳐 위기를 벗어났다는 얘기는 70년대 TV 프로그램 <전설의 고향>에도 등장했었다.
후대의 과도한 경쟁이 낳은 신화적 이미지
이성과 논리에 누구보다도 엄격했던 대학자의 생애가 비합리적 일화들로 칠해진 이유는 자명하다. 율곡 이이를 유학자 계보로는 기호학파, 붕당정치 파벌로는 서인의 태두로 모셨던 후대 추종자들의 과잉된 욕구가 이이에게 범접할 수 없는 신화적 이미지를 덧씌웠던 것이다. 영남학파의 출발점인 퇴계 이황과의 경쟁 구도도 후학들의 전의에 불을 붙인 듯하다.
율곡 이이 신화화는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에 대한 과도한 숭앙으로 이어졌다. 당대에는 뛰어난 화가로 평가받았던 신사임당이 사후 100여년이 지난 후부터 우암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 계열에 의해 ‘성인 반열의 인물을 낳은 성모 반열’로 떠받들어진 것이다. 그러한 흐름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녹아들어 ‘현모양처의 표상’이라는 이미지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유일하게 여성 인물을 채택한 오만원권 화폐의 주인공을 신사임당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율곡습지공원의 호젓한 밤나무숲
율곡 이이의 이름을 따라가는 파주 나들이의 마지막 방문지는 율곡리 주민들이 임진강변 유수지를 활용해 봄가을 화사한 꽃축제를 여는 율곡습지공원이다. 당연히 율곡 이이와 직접적 연관이 있는 장소가 아니지만, 가볼 만한 이유가 있다. 나무 사이로 이어진 산책로와 벤치를 지나 공원 안쪽까지 들어가면, 커다란 밤나무 열댓 그루가 그늘을 드리운 호젓한 숲에 도착한다. 어느새 수평에 가깝게 기운 가을 햇살이 바닥에 뒹구는 밤송이껍질을 비춘다. 하루 종일 ‘율곡’을 만난 여정을 마무리하기에 나무랄 데 없는 장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