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잘못 전해진 조선의 역사를 바로잡다
5000년 삶을 품은 고양시의 역사. 더 깊이 연구되어야 하고, 밝혀져야 할 것들이 참으로 많다. 앞으로 5회에 걸쳐 한성대학교 정후수 교수의 집필로 고양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고양문화시리즈’가 연재된다. 고양시 사적지의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연구고찰을 통해 밝힘으로서 밝혀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찾아 그 가치를 널리 소개하며 이후 더욱 깊이 있는 연구의 토대를 만들고자 한다.
‘이성계가 우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은 잘못된 기록
1863년 1월 8일, 한성판윤과 형조판서를 지낸 윤치수는 철종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조선 태조의 종계가 중국의 역사책에 잘못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곧 중국의 학자 정원경이란 사람이 편찬한 지방지 '이십일사약편(二十一史略編)'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며, 이성계가 우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였다’고 한 것이다.
조선 건국 당시부터 명나라 역사책에 잘못 전해진 기록을 바로잡기 위해 수없이 노력한 결과 200년 만인 1589년에야 말끔히 해결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을 종계변무(宗系辨誣)라고 한다.
그런데 270여 년 만인 철종 임금대에 이러한 잘못된 역사가 또다시 논란이 된 것이다. 철종은 사신을 파견하여 청나라 정부에게 이를 수정해달라고 요청했고 다행히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것도 청나라 황제에게 주청을 올린 단 9일 만에 해결을 보았던 것이다.
여기에는 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음을 물론이지만 특히 김영작이란 인물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이 사실은 청나라 학자인 정공수가 조선의 역관 이상적에게 보내온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편지의 내용을 보면 이렇다.
“먼젓번 변무(辨誣) 사건은 김영작 형이 보내온 편지 덕분에 해결되었습니다. 조대사구(趙大司寇)와 기상국(祁相國)은 중국 사관(史館) 중 제일입니다. 황제의 명은 모두 그들 손에서 나오는데 조정에 있는 여러 노신(老臣)들 중 그보다 나은 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귀국에서 소의(疏議)를 올렸을 때 매우 빨리 황제의 윤허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김영작의 편지에서처럼 간절하고도 꿋꿋한 충성심을 다 쏟지 않았다면 이처럼 신속하게 처리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김영작을 만나거든 고마움을 표하시고 아울러 그런 사실을 말씀드리십시오.”
편지 한 장으로 중국 황제 움직인 김영작은 누구인가?
1858년 겨울 북경에 사신으로 갔던 김영작은 당시 중국의 여러 학자들과 관리들을 사귀었는데 그 덕분에 그 인맥을 통해 국제적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영작은 바로 영사정의 주인인 김주신의 증손자이며, 개화파 인물인 김홍집의 아버지이다.
정후수 한성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