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북경편지』 낸 정후수 교수

18년간 매달린 ‘해린척소’ 완역
조·청 민간교류 담긴 내용 흥미진진
교직 정년퇴임 후 한문교육 전력


 


[고양신문]  30년 가까이 고양에 거주하며 고양의 문화유산 연구에 애정을 쏟아 온 정후수 한성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지난 8월 정년퇴임을 하고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학교를 떠났다. 고양의 문화와 역사를 정리한 다양한 자료를 살피다 보면 정후수 교수의 흔적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고양군 지명 유래』, 『문봉서원과 고양팔현』, 『고양금석문대계』, 『고양시사』 등의 저술하거나 펹집에 참여했고, 고양과 관련한 주요 논문만도 ‘덕수자씨 교비문 연구’, ‘영사정과 김영작’, ‘행주(幸州)와 행주(杏州)의 차이’ 등 여러편이다. 최근 세워진 최영장군 탄신 700주년 기념비의 비문을 지은 이도 바로 정 교수다.

정후수 교수는 학문적 깊이와 소탈한 성품을 고루 지녔다. 추사 김정희 연구와 조선의 중인 계층 연구에 관한 한 일인자로 손꼽히는 그가 향토의 문화사업에까지 열정을 기울이는 모습은 고맙고 귀하다.

정 교수는 최근 『북경편지(北京便紙)』(사람들)라는 새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760쪽이 넘는 엄청난 두께의 책 속에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 이상적(1803~1865)이 중국을 왕래하며 우정을 나눈 청나라의 문인과 학자 61명이 보내온 279통의 편지들이 갈무리 돼 있다. 원문을 번역하고 주석을 다는 작업에 18년간 매달린 끝에 선보이는 역작이다. 퇴임과 함께 기념비적인 저작을 마무리한 정후수 교수를 화정동의 연구실에서 만나보았다.

퇴임을 축하한다. 언제부터 교직에 몸담았나.

1975년부터 학생들을 가르쳤으니 꼬박 43년 동안 선생 노릇을 했다. 정년퇴임을 하면 좀 편하게 쉬고 싶었는데 오히려 더 바빠졌다. 10년 전부터 이사장을 맡고 있는 사단법인 유도회에서 진행하는 한문 교육과 화정동 연구소에서 하는 공부모임이 연일 이어진다. 최근에는 문화재청 사업에 선정돼 영조대왕 국장 의궤 번역을 하고 있는데 분량이 엄청 나 꼼짝을 못 하고 있다.

한문교육에 힘을 쏟는 이유가 있나.

한문은 동양 인문학의 토대다. 그런데 수준 있는 한문 실력을 갖춘 연구자가 점점 줄고 있다. 한문 공부가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초를 다지지 않고 학문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유도회에서 시험을 거쳐 선발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3년간 집중적으로 한문 고전 공부를 시키고 있다. 한문은 한자만 많이 안다고 해독할 수 있는 글이 아니다. 사서삼경의 내용을 완전히 체화해야 선인들이 쓴 문장의 문맥과 인용을 정확히 읽어낼 수 있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한문서적이 많나.

우리말로 온전하게 번역된 책은 채 10%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 책들이 연구자의 번역을 기다리고 있는데, 학계의 현실을 생각하면 답답하고 막막하다. 그래서 퇴임 후 편히 쉬고 싶다는 생각을 접었다. 유도회의 선임 선생님이 내 나이에 시작해서 30년을 교육에 매진하고 돌아가셨다. 스승님들보다는 내가 더 건강하고 여건도 좋지 않은가.

수많은 저술과 연구 성과를 보여줬다. 가장 보람 있는 성과물을 꼽는다면.

최근에 발간한 『북경편지』다. 19세기 중엽에 청나라를 드나들었던 역관 이상적이 북경의 문우들로부터 받은 편지들을 엮은 ‘해린척소(海鄰尺素)’를 국역하고 주석을 단 책이다. 일부러 기획한 게 아닌데, 18년간 번역에 매달린 결과물이 우연히 퇴임에 즈음해 책으로 출판돼 뿌듯하다.

원전을 엮은 이상적은 어떤 인물인가.

역관(통역관) 가문에서 태어난 중인 신분으로 추사의 문하를 드나들며 스승으로 모셨다. 추사의 영향으로 금석학과 고증학에 조예가 깊었고, 한편으로는 박지원, 이덕무 등의 영향을 받아 실학사상에 기초한 사실주의 문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상적의 활약은 청나라를 드나들며 빛을 발한다. 청나라의 쟁쟁한 문인 100여 명을 친구로 사귀며 당대의 사상과 정치, 외교, 무역 등 여러 분야에서 폭넓은 교류를 펼쳤다. 그의 학문은 조선 말의 개화사상가 오세창의 부친인 오경석을 직접 가르치며 후대로 이어졌다.
 

정후수 교수가 번역, 출간한 『북경편지』는 76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속에 19세기 한중문화교류의 흔적을 담은 편지들을 최초 국역하고 풍부한 주석을 보탠 역작이다.


책의 가치를 간단히 설명해달라.

우선 청나라와 조선 지식인들의 민간 차원의 교류 실태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편지 내용을 통해 당대의 사상과 철학, 문학이 풍부하게 드러난다. 학문적 풍토 뿐 아니라 당시의 사회상과 생활상도 생생하게 담겨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무엇보다도 청나라와 조선이 주고 받은 주요 문물이 흥미롭게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이상적의 사상적 궤적을 따라가다보면 19세기 조청 문화교류가 조선의 개화사상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도 짐작할 수 있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책에는 추사 김정희에 대한 청나라 지식인들의 객관적 평판을 엿볼 수 있는 자료들이 가득하다. 책을 꼼꼼히 살펴보면 당대 동아시아의 학계에서 추사가 어떻게 조명 받았는지를 살필 수 있다. 추사가 중국에 다녀온 지 40여 년이 지난 후에 쓰여진 편지에도 추사의 글 한 줄을 받아달라고 사정하는 대목이 나올 정도로 추사는 국제적으로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조선 역사상 추사 이상으로 평가를 받은 학자는 없다.

이상적과 추사의 관계가 흥미롭다.

이상적은 중국에 다녀올 때마다 종이와 붓, 벼루를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추사에게 챙겨 보냈다. 물론 책도 엄청나게 싸 보냈다. 당시의 교통 사정을 생각하면 엄청난 정성이다. 그게 고마워 추사가 그림 한 점 그려준 게 바로 세한도다. 이상적이 세한도를 들고 청나라에 나타나자 쟁쟁한 문인들이 모여들어 그림의 여백에 발문을 남긴다. 세한도를 감상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도 남아있다. 상상만으로도 감동적인 장면이다.

이상적을 주인공 삼아 조선과 청나라를 넘나드는 스케일 큰 역사 드라마를 만들어도 좋을만한 소재다. 추사 김정희는 당대의 학문과 예술을, 이상적은 문화와 국제 교류를, 그리고 이상적의 제자 오경석은 당대의 정치 상황과 개혁사상의 발아를 각각 표현하면 흥미롭지 않겠는가.

앞으로의 계획은.

특별한 계획을 세운 것은 없다. 뭔가를 인위적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퇴임 기념행사도 일절 하지 않았고, 연구소 이름도 따로 내걸지 않았다. 다만 번역해야 할 책들이 연구실 벽면에 가득하다. 하나하나 꾸준히 하다 보면 성과물이 쌓이고, 인연이 되면 책으로 묶여질지도 모르겠다.
 

『북경편지』 뒤편에는 책에 실린 '해린척소'의 한문 원본이 영인본으로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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