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영의 우표로 북한 읽기(11)
자본가이자 기독교인 기념한 우표
2018년 발행, 2025년 목록에 남아
[고양신문] 2018년 10월 15일 조선우표사에서는, ‘역사인물 기념우표 4종’을 발행했다. 고구려 명장 양만춘, 고려시대 화약과 화약무기 발명가 최무선, 조선시대 젊은 장수 남이 장군, 그리고 애국자 백선행 기념우표가 그 주인공이다.
백선행(白善行)은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이름은 아니다. 백선행이 태어날 1848년 당시 풍습대로 백선행은 이름도 없이 ‘백씨(白氏)’ 혹은 ‘백 과부’로 불렸다. 하지만 그녀가 평생 모은 전 재산을 기부하자 평양시민들은 그녀를 더 이상 ‘백 과부’라 부를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백씨 성을 가진 여인이 평생 선한 행실을 몸소 실천했다”는 의미를 담아 평양시민들은 그녀를 백선행(白善行)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백선행은 1848년 태어나 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편모슬하에서 자라면서 효행이 남달랐다. 백선행은 14세에 안재욱(安裁煜)과 결혼했으나, 2년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친정으로 돌아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삯바느질, 품앗이, 나물장사, 염색장사 등 온갖 궂은 일을 하며 철저한 절약으로 재산을 모으기 시작했다.
모은 돈으로 평양근교의 강동군(江東郡) 만달면(晩達面) 승호리(勝湖里) 일대의 광대한 황무지만달산(晩達山)를 사들였는데 이 만달산이 20년 후 시멘트 원료인 석회 석산으로 밝혀졌다. 1908년 만달산 일대를 일본인 시멘트 생산업자 오노다(小野田)에게 팔면서 평양 굴지의 갑부가 될 수 있었다.
백선행은 평소에 “재물은 내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며, 돈은 버는 것보다 바르게 쓰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철학을 가지고 살았다. 그녀는 1908년 또한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대동강에 솔뫼다리(현 백선교)를 놓으면서 사회사업을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에 감동과 충격을 받은 백선행은 민족의 미래가 교육에 있다고 믿고, 1922년 평양 강성보통학교에 학교부지와 건축비로 거액을 기부했고, 1923년에는 창덕보통학교, 1924년 송현여학교에 재산의 상당 부분을 기부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일제강점시기 일본인들을 위한 문화공간 건물들은 여럿 존재하지만, 조선인들을 위한 문화공간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1928년 당시 존재하던 일본인들의 공회당(公會堂)보다 더 크고 멋진 3층 석조건물인 평양공회당(현 백선행기념관)을 지어 기증했다.
그렇다면 북한(조선)은 왜 대자본가이자 기독교인이었던 백선행 기념우표를 2018년 10월에 역사적 유명인물들과 동등하게 주인공으로 발행했을까?
그 실마리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백선행이 기부한 단체 중 창덕보통학교를 눈여겨보아야한다. 창덕학교는 김일성 주석의 외할아버지 강돈욱 장로가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현 만경대구역 칠골)에 1907년 4월에 구국계몽운동 및 신학문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설립한 학교로 김일성 주석도 1923~1925년 약 2년 넘게 다녔던 학교다. 김일성 회고곡 『세기와 더불어』에서도 백선행을 “어려운 환경에서 근검절약하여 모은 재산을 나라와 민족의 교육 사업과 공공사업에 바친 애국적 여성”으로 높이 평가했다.
특히 남·북 관계가 좋았던 2018년 10월에 대자본가이자 기독교인이었던 백선행 기념우표를 발행했다는 것에 당시 조선 측의 개혁·개방적 방향이 진심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25년 조선우표사에서는 10년만에 ‘조선우표목록’을 재발행했다. 2025년 발행한 조선우표목록에서는 그동안 남쪽관련 우표들인, 민족대단결, 조국통일, 한반도, 독도, 남쪽관련 인물우표등 약 130여 종의 우표들을 삭제해서 발행했다.
하지만, 2018년 발행된 대자본가이자 기독교인이었던 백선행(白善行)기념우표를 2025년 발행한 조선우표목록에 남겨뒀다는 것은 진정성을 가지고 상생(相生), 공존(共存), 공영(共榮)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경우에는 종교, 자본자체에 대해 반대하고 탄압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실마리를 찾아보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