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층 참여 통해 앞서가는 문중 발돋움 소망380여년 전 고양에 첫 발 … 대규모 농사지으며 번창해와사라지는 씨족마을에 대한 기록 (18) - 전주 이씨 집성촌 식사동 저현마을취재·조사 | 박기범 기자, 고양시 씨족협의회도움말|전주 이씨 효령대군 9대손 수춘문중전주 이씨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중시조로 하는 왕손의 후예다. 전국적으로도 그 규모가 크며 고양 지역에서도 많은 종인들이 거주해 왔다. 380여년 전 고양 땅을 처음 찾은 이수춘공으로부터 시작한 전주 이씨의 역사를 종친회로부터 들어봤다. 고양신문은 고양시씨족협의회와 함께 집성촌을 찾아 그들의 삶의 모습과 조상의 모습을 엿보고자 한다. 고양신문과 고양시씨족협의회의 조사가 완료되는 순서에 따라 11월 9일 전주 이씨를 찾았다.<편집자>사진글1. 전주 이씨 수춘문중의 이은재, 이정환, 이정열, 이현규, 이택규, 이춘규, 이윤규, 이용재, 이정완(뒷줄 왼쪽부터)2. 전주 이씨 수춘문중에서 조상들에 대한 시제를 지내고 있다.2. 효령대군 영정최초 정발산 정착, 농사 위해 식사동 이주고양 땅에서 전주 이씨가 정착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80여년 전인 1625년경으로 추정된다. 전주 이씨의 고양 입향조는 이수춘공인데, 그는 고양에 오기 전까지 형님이 거주하는 충남 금산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발산으로 오게 되면서 고양에서의 전주 이씨 수춘 문중의 역사는 시작된다. 이정완 전주 이씨 효령대군 9대손 수춘문중 회장은 “그렇게 전주 이씨 수춘 조부께서 정발산 일대에서 100여년을 살았다. 그러나 당시 정발산 일대는 한강이 인접해 있지만 둑이 제대로 설치돼 있지 않아 한강이 범람하면 농사를 망치기 일쑤였고 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수춘 조부께서는 다른 곳으로의 이주를 결정하고, 새롭게 정착한 지역이 동국대학교 한방병원 뒤편 식사동 저현 마을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용재 전주 이씨 효령대군 9대손 수춘문중 고문은 “정발산 일대에서는 농사도 어려워서 피죽도 제대로 먹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다 식사동으로 이주하자 정발산과 달리 농토도 좋아서 살기가 좋아졌다”고 말했다.이처럼 전주 이씨는 저현 마을에서 300여 세대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 정도로 크게 번창했으나 이후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지금은 고양시 곳곳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다.한편 전주 이씨의 시조는 신라 때 사공(司功)을 지낸 이 한이다. 태조 이성계는 시조로부터 22세, 즉 한의 21대손 이다. 조선의 왕권은 전주 이씨인 왕족을 주축으로 하고 왕대비·왕비·왕세자비의 동성친과 이성친, 그리고 왕녀의 배우자와 그 근친 등 광범위한 혈연관계를 왕권의 일차적인 토대로 하여 발전·유지되어 왔다. 오늘날 100여 파 가운데 후손이 가장 번창한 파는 효령대군파이고 광평대군파·덕천군파·밀성군파·양녕대군파 등이 뒤를 잇는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80만 8511가구에 260만 989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규모 농사지으며 번창식사동 저현 마을은 토지와 물이 좋아 농사가 잘 되는 곳이었다. 당시에 살기 좋은 곳을 찾던 사람들이 제법 많이 모여 살던 곳이며 전주 이씨도 저현 마을에 정착하면서부터 가문이 번창하게 된다.농사의 규모도 날로 확장돼 당시 집집마다 약 1만9834㎡(6천여평) ∼ 약 9917㎡(3천여평)의 농사를 지으면서 부농으로 꼽힐 정도였다. 전주 이씨 사람들은 당시 저현 마을 일대의 대부분의 농사를 전주 이씨가 경작했다고 회고한다.이처럼 전주 이씨가 저현 마을에서 번창하자 가문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면의원이나 이장 등 마을의 주요 관직을 전주 이씨가 맡는 일도 잦았다. 1995년 2월에는 원당 지역 최초로 박사가 전주 이씨 가문에서 배출됐다. 이 일로 전주 이씨를 비롯한 원당 지역에서 마을 잔치를 열어 축하를 하기도 했다.이용재 고문은 “전주 이씨는 저현 마을 일대에서 자손들이 번창하면서 그 수가 날로 늘어나면서 마을의 주요 가문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문중에 전해져 오던 각 종 교지가 6·25 전쟁으로 소실돼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고 밝혔다.시집온 며느리 덕에 들깻잎 보급전주 이씨는 저현 마을에서 벼농사만을 크게 지으며 살아왔다. 그러던 중 이용재 고문의 부인 수성 최씨가 원당 박재궁에서 전주 이씨로 시집을 오면서 들깻잎 농사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 저현 마을에서는 아직 들깻잎 농사가 시작되지 않았던 때다.이렇게 시작된 들깻잎 농사가 집집마다 확산됐고 가계에 큰 보탬이 됐다. 당시 고양 지역에서는 강매동이 들깻잎 농사가 제일 확산돼 있었고 저현 마을이 그 뒤를 이었다. 이 고문은 들깻잎 농사로 얻은 수익으로 당시 처음 출시된 프라이드 자동차를 아들에게 선물로 사줄 정도였다고 한다.이정완 종친회장은 “당시 내가 마을 이장을 할 때인데 들깻잎 농사가 집집마다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됐다. 들깻잎은 한 번 따면 금방 다시 수확할 수 있어서 소득이 좋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작목반까지 구성해서 들깻잎 재배에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고 말했다.저현 마을에는 고양 지역 농촌 마을 중 전기가 비교적 일찍 보급된 마을이다. 당시 농촌 마을들은 전기가 필요해도 여러 가지 비용이 부담돼 전기를 이용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저현 마을 사람들도 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중 비용을 현금이 아닌 짚으로 만든 새끼로 지불했다. 당시는 이것도 농촌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다. 젊은층 참여 통해 종중 활성화 도모전주 이씨는 젊은 종인들에게서 미래를 찾고 있다. 이정완 종친회장은 “젊은층의 활발한 참여를 통해 다른 문중보다 앞서가는 문중으로 발돋움 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젊은 종인들과 함께 대종회에 참석하거나 여러 가지 교육을 병행하고 있다”고 밝혔다.젊은 종인들 스스로가 종친회의 중요성과 조상들의 은덕에 대한 고마움을 느낄 수 있도록 자발적 참여와 인식을 유도하고 있다는 설명이다.이처럼 젊은층의 참여를 활성화하고 문중 총회와 시제 등의 행사를 통해 종인들의 단합을 이끌어 낼 때 종중이 더욱 발전 할 수 있다는 것이 전주 이씨의 생각이다. 전주 이씨는 또 이를 위해 고양시씨족협의회와의 협력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일 예정이다.이정완 종친회장은 “종중의 발전과 고양 지역 씨족들의 단합을 위해 고양시씨족협의회의 일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말했다.박스 1 숭조돈중의 정신 오늘에 되살린다지난 9일 70여명의 종인들 모여 시제 올려 사진글전주 이씨의 종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조상들에 대한 시제를 지내고 있다.고양시는 도농 복합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지만 지역 곳곳이 도시화로 개발 중이며 집성촌 역시 개발 열풍 속에 해체되면서 과거의 모습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그런 가운데 매년 음력 10월이면 지내는 시제는 종인들의 화합을 도모하고 조상에 대한 은덕을 기리는 중요한 행사다. 전주 이씨도 지난 9일 70여명의 종인들이 모인 가운데 시제를 지냈다. 입향조인 이수춘공 외 9분은 원당동 왕녹골에서, 다른 30여분의 시제는 문봉동 성??에서 지냈다. 전주 이씨는 한 때 저현 마을에서 3백여 세대가 모여 살 정도로 크게 번창했다. 그러나 지금은 재개발로 종인들이 곳곳으로 이주해서 살고 있다. 그래도 시향 때면 다들 한 자리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친목을 도모하며 조상들에 대한 은덕에 감사를 올린다.이 날도 70여명의 종인들이 조상들의 산소를 찾아다니며 경건한 마음으로 시제를 올렸다. 최근 각 종친회에서는 묘소 하나하나에 따로 시제를 올리기보다는 조상들 전체에 대해 시제를 올리는 것이 보편화 돼 있다. 그러나 이 날 전주 이씨는 조상의 묘소를 하나하나 순회하며 각각 별도의 시제를 올렸다. 이런 방식은 다소 불편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전주 이씨는 자신들의 오늘을 있게 해준 조상들에 대한 보은을 위해 불편을 감수한 것이다. 이정완 회장은 “1년에 3번 정도 조상들의 묘소에서 종인들이 모여 행사를 갖는다. 전주 이씨는 이런 행사를 통해 숭조돈중의 정신을 오늘에 되새기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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