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같은 자리, 속옷 전문매장

“난 못 웃어.” 웃어달라는 기자의 요청에도 무뚝뚝한 표정이 풀어지지 않는다. 인터뷰가 끝나자 부탁도 하지 않는데 ‘고양신문 보내줘’하며 주소를 적어주는 한운수 사장.

22년 같은 자리, 속옷 전문매장
‘통큰’ 하얀 팬티, 셔츠, 소품 인기
돈방석 바지, 밭일 전용 모자도
입어보고 뒤져보고 ‘정이 넘쳐'

“아저씨, 남자 ‘난닝구’ 100사이즈 있어요? 여기 몸빼(일바지)는 1만원 맞아요?”
원당재래시장 안쪽에 백금당 어물전 바로 앞 속옷전문 ‘쌍방울’ 매장. 할머니들이 한운수(66세) 사장에게 이런 저런 주문을 한다.


1만원 파자마 바지를 들고 ‘폼이 나냐’고 묻자 한 사장은 무표정하게 ‘폼난다’고 답한다. 또 다른 아주머니가 팬티를 사러 와서는 ‘너무 비싸다’며 불평을 했다. 아무런 설명없이 한 사장은 ‘비싸면 못 산다’고 물건을 거둬들인다.
1992년부터 원당시장에서 속옷장사를 하는 한운수 사장. 손님들에게 ‘너무 무뚝뚝한 거 아니냐’고 물으니 “우리 집은 원래 저렴하다. 깎아주지도 않으니 비싸다 하면 사지 말라 한다”고 답한다. 그래도 어르신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젊은 사람들은 포장 잘된 마트나 인터넷에서 속옷을 구입하지만 어르신들은 재래시장을 찾는다.


110 사이즈의 ‘통큰’ 면팬티, 돈 많이 벌라고 지폐그림 크게 그려진 박스형 팬티, 누가 입어도 폼나는 일바지도 이곳에서만 살 수 있다. 꽃무늬 크게 들어간 티셔츠, 밭에서 일할 때 쓰는 얼굴 다 가리는 일 모자도 쌍방울 매장 인기 품목.
“마트에선 마음대로 뜯어보고 입어 볼 수도 없잖아. 그런데 여기선 다 걸쳐보고, 꺼내보거든. 그게 좋지.”
아주머니들이 주 고객인데도 한 사장은 속옷 설명도 거침없이 해주고, 원하는 물건을 골라주기도 한다. 20여년 넘게 한자리에서 같은 장사를 했으니 그 분야에서는 전문가라 할 수 있겠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같은 장사 계속 하고 있는 거야. 밥은 먹고 사니까.”


다른 매장들과 달리 속옷은 예전보다 지금이 더 잘 팔린다고. 사람들의 왕래가 더 많아졌고, 어르신들 상대의 속옷가게가 줄어들면서 오히려 경쟁력을 더 갖게 된 모양이다.
4년 전까지는 낮 시간에 아내가 장사를 맡고, 한 사장은 도매시장에 물건을 사러가는 등 외부 업무를 보았다. 아내가 세상을 뜬 이후에는 동생 한경순씨가 낮 장사를 하고 있다.
“오히려 60~70세 된 손님들이 남자 있다고 부끄러워하지. 젊은 사람들은 그러지도 않아요. 사장님이 워낙 장사를 잘해서.” 동생 한경순씨가 오빠 자랑을 한다.


절대 안 깍아준다는 한운수 사장과 달리 동생은 “속옷 장사는 마진이 별로 안 남아요. 몇천원짜리 사면서 500원 깍아 달라는 사람들도 있다”고 귀뜸을 해주었다.
원당시장에 오기 전 한운수 사장은 부산에서 장사를 했다. 지금은 신원당 아파트에서 산다. “재래시장이 좋지. 이웃도 만나고, 손님도 좋고. 내가 이 나이에 이제 뭐해? 여기서 이렇게 장사 계속 하는거지.”
한 사장은 원당상인회 모임에도 자주 나간다. 다른 상가들이 대형마트나 인터넷 때문에 장사가 안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안타깝다.


원당시장이 잘 뭉치지 못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다들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런 거’라며 감싸준다. 그래도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서로 걱정해주고 격려해주는 시장 인심이 좋다”고 말한다
“주차장 없어서 불편하지. 휴일도 같이 의논해서 쉬면 좋을텐데. 차차 나아지겠지.” 인터뷰를 마무리하는데 할머니가 다가와 “여자들 ‘쇳대(허리띠)’ 팔아요”라고 묻는다. 속옷부터 소소한 물품까지 종류도 많고, 물어보는 사람들의 사투리도 다르지만 대답과 함께 물건을 척척 가져온다.
매대 앞에 넓게 펼쳐진 할머니표 하얀 팬티를 보며 어린 시절 할머니의 손길이 아련히 떠오른다. (문의 964-9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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