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와 나의 삶 - 1세대 토박이

농촌마을에서 성장한 후 숨가쁜 변화 과정 목도
개발 과정 경제적 보상 받아도 사회, 정서적 상실감 커
쾌적한 도시 만족스럽지만 공동체 모색 쉽지 않아

1세대 토박이 3명의 이야기를 듣는 좌담회는 고양신문사에서 열렸다. 정미숙(53세, 일산1동)씨는 신도시 개발 전 마두1리에 거주했다. 조상 대대로 정씨 집성촌이었던 낙민마을에서 살아온, 진정한 의미의 ‘토박이’다. 나상호(64세, 일산 장항동)씨는 1952년 장항4리의 제방 근처에 있던 월남민 수용구역에서 태어났다. 본인의 고향은 고양땅이지만, 부모 세대는 고향을 북에 두고 온 실향민이다. 김범수(49세, 일산 중산동)씨는 8살 무렵인 1974년에 부모를 따라 지금의 백석동 부근 방기마을로 이주해왔다. 우연히도 3명의 참석자가 각각 전통부락 토착민, 월남 이주민, 경제개발기의 이주민 세대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들은 각자가 품은 단편적인 기억이 불러내는 과거의 장면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흥미진진한 대화를 이어갔다. 




(이하 나상호=나, 정미숙=정, 김범수=김)

 


Q 고양에서 보낸 성장기의 이야기를 들려달라.  

나상호(64세)
나 = 한강 제방 근처의 소위 월남 피난민 수용소에서 성장했다. 정부가 지금의 대화동과 장항동 지역에 수용구역을 만들었는데, 전쟁이 끝나면 다시 북으로 돌아가리란 기대를 품었던 이들이 결국은 터를 잡고 고양땅에 정착하게 됐다. 벌판을 가로질러 일산읍내에 있는 학교까지 6㎞ 거리를 걸어다녔다.
정 = 전통부락의 토박이 집안에서 태어나 할머니로부터 옛 어르신들의 이야기, 서당을 하셨던 할아버지 이야기, 본인이 효부상을 탄 이야기 등을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연스레 유교적 미덕과 규율들이 삶속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의 경험들이 지금까지 내 정체성의 큰 뿌리를 만들고 있다.
김 = 8남매가 함께 자랐다. 여름에 아버지랑 들길을 걸으면 반딧불이가 엄청 많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철길 옆 수로에서 물장구 치며 놀았다. 방기마을은 낮은 구릉이 이어지다가 논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언덕에 오르면 한강까지 황금들녘이 펼쳐지는 일산평야의 장관을 보며 어린 마음에도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Q. 계층에 대한 자의식이 있었나.
나 = 학교에서 아이들이 ‘수용소 애들’이나 ‘뻘놈들’이라고 부르면 속이 상하기도 했다.
정 = 70년대에 타지에서 흘러들어온 이들이 억척스럽고, 인정도 없고, 드센 사람들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토박이들 스스로도 가난한 시골 아이라는 자의식 속에서 성장했다. 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혼낼 때마다 ‘이 촌놈들아’를 입에 달고 있었으니까.
 
Q 신도시 개발 이전에 경제적 삶은 어떻게 꾸렸나.

정미숙(53세)
나 = 두말할 것 없이 농업이다. 행주산성에서부터 심학산 아래까지 한강변을 따라 아주 넓은 평야가 이어졌다. 그 평야에서 생산하는 쌀농사가 고양 사람들의 가장 큰 수입원이었다. 참 좋은 쌀이 생산됐지만, 안타깝게도 여름이면 상습적인 수해를 입곤 했다.
김 = 추수 때면 어른들로부터 10원씩 용돈을 받으며 일손을 돕기도 했다. 경운기에 집채만하게 수확한 볏단을 쌓아올리고 그 위에 올라 타 흔들거리며 논길을 돌아오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재밌고 낭만적인 기억이다.
정 = 70년대부터는 어머니들이 밭에서 기른 채소를 뽑아 경의선 새벽기차를 타고 신촌이나 독립문 등지의 시장으로 가서 팔곤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정말 부지런히 장사를 하셨다. 깻잎 농사가 잘 돼 집집마다 들깨를 심었던 기억도 난다.
나 = 텃밭농사가 쌀 수확 전까지 현금을 만드는 유일한 소득원이었다. 행상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식당의 잔반을 얻어 와 돼지를 기른 집들도 많았다. 그렇게 부지런하고 요령 있는 집들이 조금씩 재산을 축적했다.
 
Q 경의선 기찻길이 서울과 고양을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였겠다.
정 = 물론이다. 일부 학생들은 서울로 통학하러 다니는 공부길이었고, 노동자들은 품을 팔러 나가는 일길이고, 행상 나가는 엄마들에겐 장사길이었다.
김 = 고학년이 되면서 형편이 되는 일부 아이들이 서울로 전학을 갔다. 백마역에서 일산으로 가는 하행선이 지나가고 나면 5분 뒤에 서울 가는 상행선이 도착했다. 상행선을 타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나 = 하지만 대부분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서울 구경 한번 다녀온 아이가 드물 정도였다. 거리상으로는 가깝지만, 서울과 고양의 심리적 거리는 지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척 멀었다.
 
Q 1989년에 일산신도시 개발계획이 발표됐다.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을 것 같다.
나 = 일산과 분당은 건국 이래 초대형 계획신도시를 추진한 첫 사례였다. 주민들은 대부분 부동산의 재산 가치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농사 짓던 땅을 내놓는 대가로 평생 생각도 못 해 봤던 목돈을 쥐어준다고 하니 모두들 혼란스러웠다.  
김 = 표면적으로는 반대 운동이 굉장히 심했다. 평생 해 온 일을 그만둔다는 게 왜 안 두려웠겠나. 경운기 타고 다니며 군청 몰려 가 데모도 많이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반대 동력이 약해지며 보상을 받는 쪽으로 대세가 기울었다. 끝까지 버틴 분들도 있었지만.
정 = 우리 아버지 같은 경우는 지긋지긋한 농사를 그만둔다는 기대감에 은근히 개발을 반겼다. 겉으로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지만.
 
Q 토지 수용과 보상의 과정은 어땠나.
나 = 당시의 공시지가의 서너 배를 쳐 줬으니 금액 자체가 헐했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지가 자체가 너무 낮아서 그래봐야 논 한 평에 10만원을 밑돌았다. 전체적으로 5억원 이상을 보상 받은 사람이 500명 정도였다고 기억한다.
정 = 문제는 보상가격이 너무 차이가 났다는 점이다. 백마역 주변은 상대적으로 비쌌고, 평야지대는 완전 헐값이었다. 어디에 터 잡고 살았느냐가 팔자를 갈라놓은 것이다.
 
Q 갑자기 손에 쥔 목돈을 관리하는 방법도 다 달랐을 것 같다.
나 = 일부는 은행에 넣어 놓고 이자를 받는 재미를 처음 맛보기도 했고, 일부는 알뜰하게 관리하며 재산가치를 지키기도 했지만, 대개는 재산을 관리해 본 경험이 없어서 돈을 함부로 투자하고 굴리다가 어이없게 날린 이들도 적잖았다.
정 = 특히 고액 보상을 받은 이들 중에 자녀 세대가 강남에 건물을 사는 등 격에 맞지 않은 욕심을 부리다가 망가진 경우가 많았다. 졸부 흉내를 내고 싶었지만, 관리 능력은 없었던 거다. 오히려 소액을 보상받은 이들이 지금 더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는 것 같다.
나 = 가장 잘 된 이들은 대토를 마련해 농사를 계속 한 이들이다. 이들은 지금 생활면에서나 재산상으로나 든든한 삶을 살고 있다.

Q 5억원 이상 보상 받은 이가 500명 정도라고 했는데, 그 중 몇 %나 재산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정 = 안타까운 얘기지만 주변을 살펴보면 20%가 채 되지 않는 것 같다.
나, 김 = 대체로 동의한다.
 
Q 신도시 개발과 함께 마을 공동체는 어떻게 변했나.
나 = 개발 과정에서 경제적 보상은 받았지만, 그 대가로 사회적, 정서적 자산을 내 주어야 했다.

김범수(49세)
= 맞다. 개발 이전의 마을 공동체의 아름다운 가치를 회복하는 일은 완전히 불가능해졌다. 예전 친구들도 1년에 한 두 차례 모이는 게 전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가끔씩 옛 사람들과 풍경들이 그립고 아쉽다. 과거의 경험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사실 얼마나 비싼 경험인가.
정 = 토박이들의 소외는 단순히 이전 마을 공동체의 해체에 그치지 않는다. 아파트에 입주해 외주인들과 섞여 살면서 다시 한 번 소외를 경험해야 했다. 생활감각과 정보에서 토박이들이 당연히 경쟁력이 없었다. 경제적인 수단도 취약했고.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다.
 
Q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공동체를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나 = 지금은 생각과 성향이 비슷한 이들과 모이고 만나게 된다. 각자가 정체성이 다 다르니까. 지역 후배들을 만나면 종종 지역사회를 위한 모임에 참여를 권유하는데 쉽지는 않더라.
정 = 개인적인 성향 탓인지 직장생활 외엔 다른 공동체에 거의 참여 못하고 살았다. 이제 와서 나가려니 쉽지가 않다. 지역과 연대하고 교류하고 하는 일은 심리적 여유가 있는 이들의 몫이라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나만 살았다는 아쉬움도 생긴다.
김 = 신도시 아파트 입주 초기만 해도 이웃과 소통하는 분위기가 좀 있었다. 단지 내 상가도 활성화 된 시절이었으니까. 하지만 2000년대로 접어들며 아파트 생활이 완전히 이웃과 문 닫고 사는 문화로 변했다. 지금은 지역 단위 공동체는 점점 찾기 어려운 시절인 것 같다.
 
Q 새로운 공동체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어떤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보는가.
김 = 과거엔 지역공동체 안에서 자기 역할이 자연스레 부여됐는데, 지금은 경제적 면에서 개인의 경쟁력이 최우선이 되는 사회다. 고양시 안에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늘어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경제적인 면에서 내적 동력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나 = 일산신도시가 조성된 지 어느새 20년을 훌쩍 넘었다. 토박이의 구분은 이제 무의미하다. 10년 살았으면 다 원주민 아닌가. 고양에 사는 것을 자부심으로 느끼고, 원주민의 위치에서 뭔가를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수면 위로 올라와서 전문성과 열정을 발휘해주면 좋겠다.
김 = 고양이 주는 장소의 가치와 효용이 얼마나 큰가를 계산해보자. 서울과의 인접성이 좋은, 한강과 호수공원을 품고 있는 포근한 엄마와 같은 땅이 아닌가. 장소가 주는 효용과 가치에 고마움을 느끼는 마음을 서로가 공유하는 것에서부터 공감대의 출발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Q 고양이 정말 살기 좋은 도시인가. 점수를 준다면.
김 = 도시기능으로서의 고양시는 나무랄데 없다. 특히 공공도서관, 녹지 공원, 편리한 교통에서 만점을 주고 싶지만, 내용의 아쉬움으로 10점 감점이다.
나 = 호수공원 하나만 보고 이사를 왔다는 이도 보았다. 경제적 자족기반만 좀 더 갖춰지면 고양시만큼 살기 좋은 도시가 또 있을까. 현재 진행 중인 대규모 사업들에 기대를 걸어보고 싶다. 나도 흔쾌히 90점이다.
정 = 대화를 나누다 보니 참 살기 좋은 도시라는 공통적인 생각이 희망인 것 같다. 분당을 집값으로 따라가기는 어차피 힘들다(웃음). 대신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신적인 가치와 만족감을 높이는 데 집중했으면 좋겠다. 도시에 대한 내 점수는 95점이다. 고향에 대한 심리적인 애착이 보너스 점수를 줬다.
 
Q 고양의 미래에 대한 바람을 담아 마무리 멘트를 한마디씩 해 달라.

정 = 표방하고 있는 것과 실질의 차이에 빈틈이 많다. 실질적인 문화도시를 만들기 위해 고민하자.
나 = 인구 규모로 덩치를 키우는 것은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 일산구와 덕양구가 균형을 잘 맞췄으면 좋겠다.
김 = 지역적으로나 신분적으로나 높은 이와 낮은 이의 기회가 공유되는 도시, 양극화가 가장 적은 도시를 꿈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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