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을 인정하고 용납하며 평화롭게 살아요”

정신과 삶이 일치한 90년 
고양에서 가족과 함께 살며
마지막까지 도서관에서 공부 
전쟁 아픔 겪으며 평화 갈망 
임진강 헤엄쳐 통일방안 전달 
5번 사형선고 18년 투옥 고난

[고양신문] 오직 평화를 위해 살았던 고양의 이웃 김낙중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정신과 삶이 일치했던 평화주의자에겐 더없이 가혹했던 분단의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90년 인생을 참으로 꼿꼿하고 맑게 살다 가셨습니다. 선생은 지팡이에 의존하며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아람누리 도서관에 다니시며 평화와 통일, 겨레의 미래를 공부하고 고민하셨습니다. 타인의 아픔과 평화를 위한 모임이라면 낯선 자리여도 스스럼없이 먼저 찾았고,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몸의 한계를 맞으셨을 때도 고양포럼 등 지역모임을 챙기며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셨습니다. 

선생은 청년시절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겪으면서 공존과 평화를 향한 깊은 갈망을 품었고, 평생 그 갈망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은 정신병자 아니면 간첩이었던 분단 이데올로기 시대를 살았던 선생은 5번의 사형선고와 18년의 감옥, 그리고 모진 고문의 폭력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선생은 마지막 숨을 쉬는 순간까지 평화를 향한 사색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선생은 늘 “사람은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서로 용납하며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 마음을 투명하게, 용기 있게 표출했고, 마음의 중심대로 꼿꼿하게 정진했습니다. 

김낙중 선생
김낙중 선생

선생은 청소년 시절 폐병을 앓았습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사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참된 삶인가’하는 질문을 던지게 됐고, 답을 찾아 헤매던 스무 살 때 전쟁을 맞습니다. 접경지역인 파주에 살며 인민군과 국군으로 번갈아 참전, 더 큰 비통함을 느낀 선생은 전쟁과 폭력에 저항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합니다. 선생은 1954년 전쟁 직후 이승만 정권의 휴전반대, 북진통일 운동이 한창이던 부산에서 홀로 시위를 합니다. 전쟁을 통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데 누구 하나 전쟁을 그만두고 평화를 이루자는 사람이 없었기에, 죽음을 결심한 채 ‘눈물을 찾는다’는 의미의 ‘탐루’라는 글이 적힌 등불을 들고 전쟁반대와 평화를 외칩니다. 부산경찰서에 잡혀간 선생은 “평화적 통일을 어떻게 할 거냐”는 경찰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자, 평화통일 방안을 화두로 잡고 1년을 집중해 ‘통일독립청년공동체수립안’을 마련합니다. 남북의 다른 체제를 인정하고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교류하며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자는 제안입니다. ‘평화’라는 말만 해도 잡혀가던 시기에 선생은 이 통일방안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해달라며 경무대에 제출했다가 치안국에 불려갔고, 치안국은 선생을 청량리 정신병원으로 보냅니다. 1년 후 선생은 이 통일방안을 북쪽 김일성에게 전하기 위해 튜브를 타고 임진강을 건넙니다. 북쪽에서 간첩으로 몰려 죽을 고비를 넘긴 선생은 1년 후 남쪽으로 내려오자마자 다시 간첩으로 몰립니다. 간첩으로 활동한 근거를 찾지 못해 풀려나지만, 이후 60년대 4·19혁명부터 90년대까지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거셀 때마다 간첩으로 부활해 5번 사형선고를 받고, 18년 감옥에 갇혔습니다. 98년 김대중 정부 때 감옥에서 나온 선생은 여생을 고양에서 보내며 평화의 진리를 찾는 공부와 사색에 몰두했습니다. 

진리를 위해 살겠다는 마음을 깊이 새기기 위해 새끼손가락을 잘랐던 24세 청년 김낙중의 정신은 90세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도 고결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김낙중 선생에게 붙여진 분단 시대의 가혹한 족쇄를 풀고 다른 이름으로 불러봅니다. 선생은 정치도 전략도 계산도 없이 오직 정신과 삶을 곧바로 일치시켰던 지극한 평화주의자였습니다. 겨레의 아픔, 타인의 아픔을 온전히 자신의 아픔으로 안고 눈물 흘리며 위로하는 이타주의자였습니다. 

“짐승은 배고프거나 생존에 위협을 느끼지 않으면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아요. 생각이 다르다고 타인을 공격하고 죽이는 건 인간뿐입니다. 국가도 개인도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용납하며 서로 평화롭게 살아야 해요.” 몇 해 전, 마지막 강연 말씀이 아직도 마음에 생생합니다. 

두려움과 고난, 좌절을 뛰어넘어 이상과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라면, 선생은 여한 없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다 떠나신 겁니다. 다만 선생은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현실적 아픔을 곁에서 함께 감당해내야 했던 아내와 자식들에게만큼은 한없이 미안해하셨습니다. 분단 이데올로기 역사를 건너며 숱한 고난과 희생이 있었지만 어느덧 역사는 흘러 그 희생을 주목하고 기리는 시대를 맞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오직 평화를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선생의 삶이 다른 어떤 정치인이나 학자보다 의미 깊게 재평가될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정신이 곧 행동이 되는 삶, 그리울 겁니다.                          

발행인 이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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