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 문화평론가
이인숙 문화평론가

[고양신문] 모두가 일시에 눈이 멀어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불편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종국에는 인간의 본능만 살아남아 아비규환의 세상이 될 것이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먹이를 찾아 헤매야 하고 누군가 먹을 것을 발견하면 뺏고 뺏기는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질 것이다. 힘 센 사람은 남보다 더 많은 먹이를 차지할 테고, 강자 옆에 붙어서 호가호위하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한 마디로 본능만 남은 야수들의 동물농장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오랜 역사를 통해 강자만이 살아남는 야만의 시대에서 점차 함께 살아가는 문명의 시대를 열었다. 물론 아직도 야만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곳도 많다. 우리는 어떤가. 지난 수십 년간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제법 괜찮은 세상이 되었다고 자부한 적도 있다. 문명의 시대를 여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한발 잘못 디디면 한순간에 세상은 무너진다. 이를 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한가,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이 얼마나 불안정한 땅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흔들리는 땅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곡예라도 해야 할 텐데, 지금부터라도 줄타기하는 재주를 배워야 할까. 

  탐욕과 무지는 사람을 눈멀게 한다.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눈먼 사람들의 탐욕과 어리석음이 세상을 한순간에 야만의 시대로 되돌려 놓았다. 눈먼 세상에서는 폭력성이 무기가 된다. 뻔뻔함과 폭력성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이성과 합리는 통하지 않는다. 한손에 무기를 들고 억지를 부리며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면서 이들은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이를 지지해주는 눈먼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먹이를 차지하기 위한 그들의 탐욕과 어리석음이 폭력과 온갖 부조리를 용인한다. 

  막말과 허위와 거짓말, 폭력이 일상화되는 세상, 이 야만의 시대에 모두가 같이 눈이 멀어야 할까. 아니면 바람이 불기도 전에 바짝 엎드리는 풀이 되어야 할까. 해탈한 듯이 체념과 달관의 포즈를 취해야 할까. 

  누구는 혼자만의 방에 자신을 가두고 터져 나오는 분노의 외침과 울음을 꾹꾹 눌러 담는다. 누구는 일상의 즐거움을 좇으며 세상을 잊으라고 한다. 모르는 게 약이니 아무 관심 갖지 말라고 하는 이도 있다. 

  분노가 쌓이면 심성은 사나워지고 붓끝은 거칠어진다. 불교에서 탐진치(貪瞋痴)는 인간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세 가지 독(三毒)이라고 한다. 탐욕(貪)과 어리석음(痴)은 사람을 눈멀게 하지만 이 눈먼 야만의 세상에서 분노(瞋)조차 하지 않는다면 지옥은 언제 끝날 것인가. 

  『눈먼 자들의 도시』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모두가 눈먼 도시에서 지옥을 경험한 시민들이 4년 후에 일제히 눈을 뜨게 됐을 때 일어나는 일을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 다시 한 번 보여준다. 지방 선거일 아침, 수도의 각 투표소에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선거관리인들은 초조해 하지만 오후 4시가 되자 시민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와 줄서서 투표한다. 개표 결과 80퍼센트가 넘는 백지투표, 기권이나 무효표가 아닌 순수한 백지다. 정부의 권위와 정통성을 부정하는 수도 시민들의 백지투표에 분노한 당국은 계엄을 선포하고 한밤중에 몰래 도시를 빠져나간다. 그리고는 첩자를 들여보내 누가 이 사태를 주도하는지 알아내려 한다. 주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환멸을 느낀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눈을 뜨고 그들의 환멸을 백지투표로 표현했을 뿐이다. 

  계엄령 하에서 어렵게 진실을 밝힌 신문은 가판대에서 사라지고, 사라진 기사 내용이 유인물로 복사되어 거리에 뿌려지고 집집마다 배달된다. 그러자 정부는 누가 복사비를 댔는지 알아내라고 닦달한다. 이 익숙함, 우리도 촛불시위 때 양초값을 누가 대는지 알아내라고 했던 정부를 가진 적이 있다. 한결같은 이들 사고의 단순함이 실소를 자아낸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도 아닌데 우리의 시간은 왜 자꾸 거꾸로 흘러갈까. 얼마나 더 세월이 지나야, 얼마나 더 많은 일을 겪어야 우리도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있을까. 모두가 일제히 눈을 뜨는 기적은 한갓 꿈일 뿐이다. 그러나 시간을 다시 수십 년 과거로 되돌리지 않으려면, 강자만 살아남는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우리 모두 탐욕과 무지에서 벗어나 눈을 뜨는 날을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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